[이코노타워]정책책임자 ‘즉흥발언’…금융불안 되레 부추긴다

  • 입력 2000년 12월 11일 19시 00분


금융시장을 안정시켜야 할 정부가 금융불안을 초래하는 정책실수를 범하고 있다며 금융계가 반발하고 있다. 대통령 경제수석과 금융감독위원장 등 고위 경제정책 당국자들이 신용금고 영업정지 은행합병 등 설익은 정책을 발표하거나 무책임한 발언을 함으로써 금융불안을 야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신용금고 예금 인출사태〓11일 익명을 요구한 한 신용금고 사장은 “이기호(李起浩)대통령 경제수석이 신용금고 금융사고가 1, 2건 더 있다고 밝힌 2일부터 신용금고에서 예금인출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며 “이수석은 최근의 신용금고 예금인출 사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용금고연합회는 9일 “불법대출 금고가 1, 2개 더 있다는 정부관료의 발언이 거래자의 불안심리를 악화시켜 대규모 예금인출사태가 일어났다”며 신용불안을 초래할 수 있는 정부 관계자의 발언을 신중하게 보도해달라고 언론사에 공문을 보내 협조를 요청했다.

금융감독원 김상우(金相宇)부원장보는 10일 신용금고 대책을 발표하면서 신용금고 2개가 추가로 영업정지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혀 예금자들의 불안을 부채질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신용금고 업계는 금감원이 10일 신용금고에 1조원을 긴급 지원한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다. B금고 사장은 “신용금고 예금은 전액 보호대상이기 때문에 예금보험공사에서 한도에 관계없이 지급할 것이라는 한마디만 하면 인출사태가 진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량은행 합병과 부실은행 연내정리〓이근영(李瑾榮)금감위원장은 8월 취임 때부터 우량은행간 합병이 임박했다는 얘기를 해오고 있다. 9월에는 10월에 합병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가 10월이 되자 11월로 미뤘다. 11월에는 다시 슬그머니 12월로 넘겼다. 그러나 12월11일까지 우량은행간 합병은 여전히 설(說)로만 떠돌아다니고 있는 실정이다.

주택은행 김정태(金正泰)행장은 이금감위원장이 “이번주중에 우량은행간 합병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밝힌 데 대해 “우량은행간 합병이라는 원칙에서 국민은행과의 합병은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이기는 하지만 수백명의 직원들을 해고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고 지적했다.

한미은행 대주주인 칼라일펀드 김병주회장도 “주주의 이익이 극대화되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부의 결정이 주주의 이익을 우선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감독당국이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은 부실은행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지 우량은행간 합병을 독촉하는 것은 아니다”고 비판했다.

한빛은행 등 부실은행에 공적자금을 충분히 투입해 연내에 우량은행으로 바꿀 것이라는 장담도 불투명한 실정이다. 금융지주회사로 묶겠다는 기존방침이 부실지방은행을 우량은행에 통합시킨다는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일부 우량은행의 불만을 사고 있다.

▽정부 입장〓신용금고 예금인출 및 은행합병에 대한 금융계 반발과 관련해 정부는 나름대로의 반론을 펴고 있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금고 사고가 1, 2건 더 있다는 경제수석의 말은 실수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금감위는 이를 가능성 차원이라고 바로 해명보도자료를 냈다. 하지만 언론은 별로 취급을 안해줘 문제를 키웠다”고 주장했다. 이수석도 “은행자율에 맡겨놓으면 일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는다”며 “변화의 시대에는 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재경부 국장은 “고위당국자들이 원칙과 능력을 갖추지 않고 한건 하겠다는 생각으로 확정되지 않은 정책에 대해 너무 자주 언급함으로써 불필요한 혼란과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진념(陳稔)재경부장관도 8일 “은행 합병과 관련된 각종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지만 결정된 것은 없다”며 “시중에 나도는 여러 시나리오 때문에 대주주들이 불안해하고 있어 금감위원장에게도 일절 내용을 미리 말하지 말라고 주문했다”고 밝혔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신용금고 인출사태에 대해 “이수석의 발언이 신용금고 예금인출을 촉발시켰다”며 “금융시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무책임한 발언으로 금융시장이 불안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 시각〓CBF금융그룹 유한수 회장은 “고위당국자의 무책임한 말로 신용금고 예금인출사태가 일어남으로써 공적자금을 최소한 1조원 이상 늘리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금융계에선 이용근(李容根)전금감위원장이 7월 포드가 제시한 대우자동차 인수자금을 공표해 매각협상이 무산됐고, 이석채(李錫采)전대통령경제수석이 97년1월 “은행도 부실화되면 부도내겠다”고 밝혔다가 발언을 취소한 뒤 정부에 대한 대내외 신뢰도를 떨어뜨렸던 잘못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우려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홍찬선·박현진·최영해기자>hc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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