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Fashion]'파시스트 패션' 새롭게 뜬다

  • 입력 2000년 11월 14일 18시 31분


뉴욕 소호에 있는 디자이너 헬무트 랑의 가게 앞에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독수리 세 마리가 마치 파수병처럼 버티고 서 있다. 고압적이고 위협적인 이 독수리들은 패션 부티크의 장식품으로서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지만 힘과 지배의 상징들을 이용한 파시스트 스타일이 요즘 들어 부쩍 눈에 띈다는 점을 감안하면, 랑의 선택에는 나름대로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20세기의 전체주의 정권들이 내세웠던 현대적 기능주의와 고전적인 스타일의 혼합물인 파시즘의 야만적인 미학은 오늘날 건축 패션 사진은 물론, 영화와 패션쇼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특히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올 여름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2001년 봄을 위한 패션쇼에도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식의 속옷과 흉갑, 그리고 몸 위로 천을 늘어뜨리거나 몸을 묶는 형식의 옷들이 최신 스타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주의적 스타일이 반드시 고대 로마나 그리스식의 옷들로만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우치아 프라다와 미구엘 아드로버 등 일부 디자이너들은 좀더 현대적인 쪽으로 눈을 돌려 제복을 이용한 작품들을 내놓았다.

파시즘의 인기는 근육질 몸매에 대한 오랜 집착에서도 엿볼 수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조르지오 아르마니 회고전의 카탈로그에는 사진작가 허브 리츠가 찍은 남성 누드사진이 포함돼 있는데, 이 남성의 근육질 몸매는 히틀러의 선전담당이었던 레니 리에펜슈탈(98)이 찍은 올림픽 영웅들과 전사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사실 리에펜슈탈은 파시즘의 인기에 힘입어 요즘 들어 부쩍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현재 그녀를 주제로 한 몇 권의 책과 영화들이 기획되고 있으며, ‘글래디에이터’의 세트 디자인을 맡은 아서 맥스는 리에펜슈탈이 찍은 나치의 깃발들을 많이 참고했다고 인정했다.

파시즘과 전체주의가 이처럼 인기를 끌고 있는 것에 대해 잡지 ‘아키텍처’의 편집자 네드 크레이머는 “이런 말을 하기는 정말 싫지만 파시즘은 섹시하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십년 동안 비난의 대상이었던 파시스트 스타일이 주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수잔 손탁은 1974년에 발표한 에세이 ‘매혹적인 파시즘’에서 파시스트 미학이 현대에 호소력을 갖는 것은 야만적인 힘과 성을 동격으로 놓은 데서 기인한다며 “194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파시즘은 이국적인 미지의 것을 상징한다”고 썼다.

뉴욕의 패션 디자이너 열리 텡도 손탁과 비슷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녀는 전체주의의 공격적인 스타일이 유혹적인 매력을 갖는 것은 그것이 ‘암흑의 유산’이기 때문이라며 “힘은 사람들을 가장 크게 자극하는 요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의 파시스트 스타일이 과거의 파시스트 미학과는 다르다는 의견도 있다. 뉴욕의 패션 학교인 FIT의 발레리 스틸은 요즘의 파시스트 스타일은 획일적인 권력의 이미지를 오히려 망가뜨리고 있다면서 이들이 “추방된 사람들, 위험한 세상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http://www.nytimes.com/2000/11/12/living/12FASC.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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