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책사람세상]몸으로 읽기

  • 입력 2000년 10월 27일 19시 08분


400만부 이상 팔린 ‘파리 대왕’의 작가로 1983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윌리엄 골딩(1911∼1993), 특유의 작품 세계로 탄탄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 이외수, 쿠마라지바(鳩摩羅什)의 제자로 중국 불교 최대의 천재로도 일컬어지는 승조(僧肇·383?∼414?).

◇필경사로 일하며 학식 쌓아

이들은 모두 한 때 필경사로 일한 적이 있는데, 승조와 윌리엄 골딩의 경우는 각별하다. 승조는 생계 유지를 위해 필경사 일을 하다가 베끼는 책의 내용을 모두 암기하게 되었고, 이것이 뛰어난 학식의 바탕이 되었다. 윌리엄 골딩은 문학에 뜻을 두었으나 역시 형편이 어려워 필경사 일을 했는데, 창의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고, 결국 창작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플로베르의 소설 ‘부바르와 페퀴셰’의 동명 주인공 두 사람 역시 필경사였다. 우연히 만난 그들 두 사람이 갑작스럽게 상속받은 유산을 가지고 시골로 은퇴하여 다양한 학문 연구에 몰두하다가 실패한 뒤, 예전의 직업인 필경사로 되돌아간다는 이야기이다.

필경은 인쇄술이 보급되기 이전에는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설형문자를 읽고 쓰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바빌로니아나 앗시리아의 필경사들은 거의 독립된 계급을 형성하여 글자를 모르는 관리들이나 왕보다도 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붓이나 펜을 먹이나 잉크에 적셔 종이 위에 적는 필경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대신에 비트 형식으로 디지털화되어 있는 문자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키보드나 마우스를 손으로 조작한다는 측면에서 그 역시 간접적인 육필(肉筆)인지도 모르지만, 역시 온전한 의미의 육필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쓰기뿐만 아니라 읽기도 마찬가지여서, 한 손으로는 책을 받쳐들거나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는 육독(肉讀)의 시대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바야흐로 모니터를 바라보며 마우스나 버튼을 조작하여 읽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읽기는 온몸의 신경 동원

읽기는 눈만 관여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오감과 두뇌는 물론이거니와 사실상 온 몸의 신경이 체계적, 전체적으로 작용하는 고도로 복잡한 신체 행위이기도 하다. 전자책이나 웹페이지를 읽는 디지털 시대의 읽기가 매체 수용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영향일지. 최근의 새로운 매체 환경은 읽기의 진화론이라는 새로운 성찰의 주제를 던져주고 있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인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신경생리학 생물학 미디어론 철학 산업공학 출판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천착해야 할 주제라 하겠다. 관련 연구자들의 분발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표정훈(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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