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승철/'벤처 광풍'이 지나간 자리

  • 입력 2000년 10월 26일 18시 39분


밴쿠버섬의 인디언 콰우키틀족은 ‘폼생 폼사’하는 사람들이다. 재산이 많음을 과시해야 살아가는 맛을 느낀다고 한다. 이들은 손님을 초대해서 엄청난 물량의 선물을 주는 행사인 ‘팟래치(potlatch)’를 즐겨 벌인다.

손님이 북적거리고 잔치판과 선물이 푸짐할수록 주최자의 위세가 높아진다. 잔치는 며칠씩 계속되기도 한다. 나눠주는 예물은 모피, 담요, 바구니 등이다. 융숭한 대접을 받은 손님은 더 큰 규모의 팟래치를 열어 상대방의 콧대를 꺾겠다고 다짐한다.

때때로 허세를 부리는 추장은 산더미처럼 물건을 쌓아놓고 여기에 생선기름을 부어 불을 지른다. 구경꾼들은 이를 보고 존경심을 품는다. 재산파괴자는 자신의 대범함을 뽐내며 “나는 이 세상의 유일한 위인이다”라고 외친다. 정신이 멀쩡한 외부인이 보면 ‘광란의 파티’로 여길 것이다.

콰우키틀족의 이런 원시사회 행태가 한국에서도 보이고 있다. 그것도 ‘디지털 시대’의 상징이라는 서울 강남의 ‘서울벤처밸리’ 부근에서. 일부 젊은 벤처기업인들은 호화 룸살롱에서 ‘강남판 팟래치’를 벌인다. 서너명이 단 하룻밤에 1000만원을 뿌리는 술판에 앉는다. 이런 대접을 받는 사람은 다음 번에 더욱 ‘화끈한’ 향연을 벌여 위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기기묘묘한 고급양주가 선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관복(官服)을 벗고 벤처경영인으로 변신한 K씨. 그는 국산 최고급 승용차 에쿠스를 타고 다닌다. 그를 영입한 벤처기업에서 마련한 것이다. 임대료가 엄청 비싼 강남 소재 그의 사무실도 널찍하다. 소파며 책상이며 모두 최고급품이다.

한때 강남의 인테리어 전문점이 호황을 누렸다. 벤처기업 최고경영자의 집무실을 ‘프랑스 풍(風)으로’ 꾸며주는 일감을 잇따라 수주한 덕분이다. 경쟁적으로 더욱 호사스럽게 사무실을 꾸미는 축이 있었다. 물론 이런 몇몇 사례 때문에 다수 벤처기업인들의 순수한 벤처 열정이 매도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에 쓰이는 돈은 어디서 나왔는가. ‘벤처 열풍’을 좇아 몰려든 자금 아닌가. 벤처 자금, 일확천금을 노리고 투자한 엔젤 투자자의 쌈짓돈 등이다. 혈세로 조성된 정부 정책자금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정현준 게이트’를 보자. 아직 사건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봐도 원시사회 행태가 압축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이가 불과 32세인 정현준 한국디지탈라인 사장. 일반 회사에 들어갔으면 지금 갓 대리가 됐을 나이다. 그가 주무른 자금이 무려 몇백억원이다. 그는 고급카페를 운영하고 외제 승용차도 여러 대 가진 것으로 보도됐다.

정부가 추진한 벤처정책을 살펴보면 팟래치 마당을 벌여준 사례가 적지 않다. 몇 년 안에 벤처기업을 몇만개 만들겠다고 법석을 피웠다. 온갖 요란한 벤처지원정책이 동원됐음은 물론이다. 정부의 뭉칫돈이벤처쪽으로 흘러갔다. 이를 거머쥐기 위해 사람들은 부나방처럼 몰려들었다.

‘벤처 광풍(狂風)’이 한국판 팟래치 마당을 한바탕 불고 지나간 지금, ‘권력형 비리’란 악취마저 풍기고 있다. ‘정현준 게이트’보다 훨씬 강력한 벤처관련 비리폭탄이 줄줄이 터지지 않을까….

고승철<경제부장>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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