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YS 말릴순 없더라도

  • 입력 2000년 10월 20일 18시 31분


김영삼 전대통령이 고려대 특강을 한 20일 현장에 가보았다. 며칠전 문전축객을 당한 것이 보도되어서인지 대학생말고도 기자와 시민, YS일행이 많아 강의실은 100명 약간 넘게 붐볐다. 전날 민주산악회 재건 모임도 마친 그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러나 두시간여 ‘자유스러운’ 문답이 끝난 뒤 일어서는 청중 분위기는 어딘지 떨떠름하고 허탈한 것이었다. 아니, 이런 식의 ‘자신감’ 넘치는 행보가 잦아질수록 넌더리나는 ‘YS코미디’는 또 얼마나 번져 갈 것인가 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조차 있었다.

그는 재임중의 안가(安家)철거 군부숙정 금융실명제 ‘아들구속’지시같은 업적들을 한시간 넘게 나열했다. 그리고 임기말의 금융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원인은 당시 야당이 노동법 한은법 개정을 반대하고 기아자동차 사태 해결을 지연시킨 탓이라고 전가(轉嫁)했다. 대통령이었던 그의 ‘망국’책임은 존재하지 않았고 반성도 없었다. ‘대통령학’ 강좌의 소재로 재임중의 성공과 실패를 검증해 보려고 그를 초빙한 교수와 학생들의 의도와는 얼마나 맞아떨어진 것일까. 보도를 통해 접하던 동문서답, 현문우답의 코미디를 강의실에서 확인한 정도였지 않을까.

YS는 그가 자랑하듯이 무려 92년 대통령선거에서 200만표 차이로 당선시켜준 유권자가 있었고, 취임초 90%가 넘는 지지도를 가진 기대주(株) 지도자였다. 그리고 5년이나 이 나라 최고의 의사 결정권을 휘둘렀던 전직 국가원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정치를 둘러싼 그의 코미디 발언, 우스꽝스러운 행보는 거제도 어느 집안의 체면 문제가 아니라 한국민의 체통과 위신에 이어져 있다. 그의 정치적 롤백은 바람직스럽지도 않지만, 그가 굳이 고집한다면 백해무익(百害無益)의 소극(笑劇)은 안되도록 해야할 최소한의 의무가 그에게 있다.

그러나 요즘 그의 발언은 장탄식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인제씨 논산(論山)상가에 자신의 화환이 DJ화환보다 잘 보이는 곳에 놓인 데 대해 ‘이인제의 신의’를 평가한다. 정치인은 목소리가 중요한데 목청이 좋은 이인제가 유리할 것이라고도 했다. 일전의 고려대 특강이 무산된 것도 ‘김대중 김정일의 합작품’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대통령을 지낸 이의 발언치고는 짜증스러울 정도로 치졸하지 않은가.

나아가 민주산악회 재건이나 김정일 답방 반대 서명운동을 ‘제2의 3·1운동’이라고 하고 서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고 호언한다. 현 정부의 통일정책이 헌법위반이라고도 한다. 1국가2체제 인정이니 헌법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는 ‘김정일이 남북한 대통령이고 DJ는 장관, 아니 김정일이 회장이면 DJ는 사장도 아닌 전무쯤이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의 재임시절 대북정책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취임사에서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94년 김일성 주석과의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대통령으로서 95년 북한에 15만t의 쌀을 조건없이 ‘퍼 주기로’ 결정하고 “외국쌀을 사서라도 보내주겠다”고도 했다. 또 이인모씨를 최초로 돌려보내 장기수 북송 길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6월의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자 YS 지지자들은 ‘김영삼이 다 해놓은 일을 김대중이가 사진만 찍고 생색냈다’고 한 것은 사실의 일면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YS는 ‘식물인간이 아니므로 정치 발언을 할 자유가 있다’고 강변하면서 자신마저 침묵하면 국민과 역사앞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그 발언은 감정과 분노의 배설이 아니라 마땅히 논리와 합리의 바탕위에 설득력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재임시의 실패에 대해서도 보다 겸허히 반성하는 자세를 보이고 나서 여야에 충고하는 것이 순서다. 그를 초빙한 고려대 교문옆에 ‘민생파탄 경제파탄 김영삼은 사과하라’는 플래카드를 그도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직대통령으로서 세간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일만은 삼가야 한다. 고려대 특강에서도 ‘용기와 신의’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역설했지만 다들 코웃음치는 분위기였다. 자신의 비판적 공언이 ‘용기’이고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겨냥해 ‘신의’없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웃고 나면 서글퍼지고 우울해지는 국민도 생각해주기 바란다. 재임중의 실패도 통분스러운데 퇴임후 ‘블랙 코미디’ 공해(公害)까지 안겨주는 건 너무하지 않는가. 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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