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의 바둑세상만사]버려야 산다

  • 입력 2000년 8월 28일 09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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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대우가 바둑의 사석 작전을 알았다면?
현대와 대우가 바둑의 사석 작전을 알았다면?
돌을 버려라. 그래야 이긴다.

바둑 초심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사석작전이다. 바둑은 가능한 상대 돌을 많이 잡고 자기 돌을 죽이지 않아야 하는데 멀쩡한 자기 돌을 죽이라니.... 그러고서 어떻게 바둑을 이긴단 말인가?

바둑판 위에 놓인 돌에는 요석과 폐석이 있다. 요석은 중요한 돌로서 꼭 살려야 하지만, 폐석은 그냥 죽여도 대세에 지장이 없다. 오히려 움직여봐야 쓸데 없이 공격목표가 되어 이리저리 도망다니다 대세를 그르치고 만다. 그런 돌은 애초에 죽여버리는 게 낫다.

이런 경우 대개는 그 대가로 두터운 세력을 얻게 되고 그 세력을 바탕으로 다른 곳에서 이득을 보게 된다. 상대 입장에서 보면 버리는 돌을 꿀꺽꿀꺽 주어먹다가 소탐대실하는 것이다. 이런 원리는 기업경영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요즘 대우,현대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재벌기업의 구조조정 작업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바둑의 사석 작전을 알았다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한사람이 거느린 기업수가 수십여개, 업종도 잡다하기 그지없다. 된장 수입에서 첨단 항공산업까지.... 돈만 되면 무엇이든 사업을 벌려놓고 봤다. 더구나 2세에게 대물림까지 한다.이것이 지금까지 우리 재벌기업의 경영이었다. 기업이 아니라 탐욕의 전시장을 보는 듯했다.

이런 기업 형태는 세계에도 유래가 없어 외국서도 우리나라 재벌을 부를 때 그냥 재벌이라고 부른다. 적당한 번역어가 없어서인지 재벌이 영어의 특수명사가 된 것이다.

덩치가 크면 죽지 않는다. 대마불사의 신화를 너무 믿었을까? 그러나 이제는 여기저기 널린 곤마가 오히려 대마의 생명까지 위협하고 있다. 애초에 죽여야 할 폐석을 질질 끌고 다니다가 오늘의 파국을 맞이한 것이다.

사실 자기 돌을 죽인다는 일은 쉽지 않다. 열손가락 깨물어 모두 아픈데 귀여운 내 새끼들을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그러나 승부라는 큰 관점에서 봤을 때 죽여야 할 돌은 일찌감치 죽이는 것이 낫다. 그래서 바둑이 좀 늘면 돌을 죽이는 재미로 바둑을 둔다는 사람도 생긴다.

프로기사 중에는 대체로 공격형 바둑이 사석작전에 능한 편이다. 유창혁 9단이 대표적이다. 큰 이익을 위해 작은 손실을 마다 않는다. 마치 먹이를 던져주듯 작은 돌 몇점을 버리고 대세를 장악하는 바둑을 보노라면 통쾌한 기분까지 들 때가 있다.

조훈현 9단 같은 이는 자기 돌을 잘 안버리는 기사로 유명한데, 그래도 불필요한 돌은 쓸데없이 끌고 다니지 않는다.

바둑의 사석작전은 말이 쉽지 실전에서는 꽤 어려운 전술이다. 어느 돌을 죽이고 어느 돌을 살려야 하는지 그 판단이 더 어렵다. 이 돌을 죽이고도 내가 바둑을 이길 수 있는가 하는 형세판단과 더불어 요석과 폐석을 구분하는 판단력. 그 판단력이 정확할수록 바둑이 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정리해야 할 때다. 비록 늦긴 했지만 살려야 할 주력 업종만 남기고 쓸데없는 폐석은 버려야 한다.

김대현 <영화평론가·아마5단> momi21@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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