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전향서 한 장

  • 입력 2000년 8월 25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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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에 들렀다가 무심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곤 선 채로 반을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시집인줄 알았습니다.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는 제목이 그랬습니다. 아아, 그러나 시도 산문도 그렇게 진하고 극적인 충격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참혹하고 불행한 삶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0.75평 독방에서 징역살이한 게 아니다. 사실은 화장실에서 30년 넘게 산 셈이다. 화장실에서 먹고 자고 책을 읽으며 인생의 절반을 보냈다. 옹기통은 냄새는 덜 풍기지만 잘 깨졌다. 나무 변기는 깨지지는 않아도 틈새로 오물이 새 냄새가 지독했다. 화장실서 생긴 하루살이가 독방 천장을 까맣게 메운다.’ 소설 ‘철가면’이나 영화 빠삐용의 장면들이 고스란히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배고픔과 고독을 잊기 위해 영어 단어를 외우는 몸부림도 가히 소설적입니다. 필기구가 없는 독방에서, 손가락으로 벽에 단어를 써보았더니 굳은 살이 박이고, 젓가락에 물을 찍어 독방바닥에 적었더니 금세 말라 버려 소용이 없고, 그렇게 10년쯤 지난 뒤에야 비닐 위에 버터를 발라 쓰는 글판을 발명해냈다는 대목도 읽었습니다.

전향서(轉向書) 한 장 때문에 목숨을 건 일도 알게 되었습니다. ‘전향압박이 강화될 때면 사전과 성경을 빼곤 모두 압수한다. 비전향 장기수의 책에 대한 열정과 집념을 알기 때문이다. 남은 영어사전을 A부터 Z까지 외우기 시작한다. 그러자 영어사전도 압수했다. 국어사전 3328쪽을 다 읽었다. 국어사전도 앗아갔다. 이제 성경을 읽었다. 그런데 전향을 권유하는 목사에게 성경 구절을 인용해 반박한 일이 있고 나서 성경까지 빼앗겼다.’ 70,80년대 전향공작이 극심했던 때는 매질도 심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김동기씨. 책의 저자인 당신의 사상과 고집에는 반대하지만, 법치국가 대한민국의 가장 깊고 어두운 응달에서, 당신 표현대로 ‘준엄한 역사의 시련’을 몸으로 겪은 당신의 글에서 많은 것을 알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지난해 출소해 광주의 ‘통일의 집’에서 생애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면서, 이제 꿈에도 그리던 귀향 가족상봉을 며칠 앞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당신은 행복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66년 남한체제를 흔드는 공작을 위해 간첩으로 넘어왔다가 체포되어 징역을 살고 이제 당당히 책까지 펴냈습니다. 거기에 교도관과 부당한 행형(行刑)을 비판하고 인권단체의 귀한 손님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역사의 진전입니다. 사살되고 맞아죽은 간첩, 수감중 병들어 죽은 장기수의 원혼들도 놀랄 것입니다.심지어 민주화를 부르짖은 죄로 억지 간첩으로 몰려죽고, 맞아 죽은 게 한 둘이 아닌 그런 강퍅한 시절의 고비를 다들 넘어 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탁입니다. 북에도 이름은 달리 하지만, 납북자 국군포로 등 ‘역사의 시련’에 몸을 떨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탈북 국군포로 조창호씨의 증언에도 나오고, 북을 다녀온 작가 황석영의 기록에도 북한체제의 ‘그늘’에 사는 사람들의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당신이 책에 썼듯이 ‘세상에 가장 귀한 게 인간이요,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때 존엄성을 갖는 것인데, 이념에 따라 차별 받는다면 이것은 현대문명에 대한 모독이다’는 말이 맞습니다. 제발 그들을 인간답게 살리고, 원한다면 귀향도 시키는 데 나서주길 부탁합니다.

당신의 서른 세해 쌓인 고통과 한이, 비전향 장기수 개인의 한풀이나 북녘의 혁명 영웅 만들기에 그쳐서야 너무 아깝지 않을까요. 당신은 책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송환되는 날, 내 가슴속에 무등산의 아름다운 모습과 사람들이 베풀어준 아름다운 정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갈 생각이다. 그래서 내 가족 친지 이웃, 고향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나의 도덕적 의무라고 믿는다.’

당신의 동료도 외칩니다. ‘미움도 원망도 다 사르고 묻어라. 묵어 거름되게 하라. 그리하여 화해와 협조로 분열을 하나되게 하는 거다.’ 비전향 장기수 양희철씨가 29일 펴낼 책 ‘자유의 시 저항의 노래’의 한 구절입니다. 인권의 그늘이 없는 남과 북, 인간애 넘치는 통일 조국을 다같이 생각합시다. 안녕히 가십시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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