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신간]'그대들의 자유, 우리들의 자유'

  • 입력 2000년 8월 25일 18시 32분


“폴란드 민족, 아마도 이들은 세상에서 강자가 약자를 이긴다는 자명한 역사적 진리를 믿지 않는 유일한 민족일 게다.”

남의 말 같지 않다. 지정학적 요충지에서 수없는 침략을 견뎌내고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사 또는 독립운동사를 다시 ‘독립전쟁사’로 바꿔 쓰고 있는 우리 역시 우리 민족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착각 속에서 무모한 역사를 살아 왔는지 모른다.

‘폴란드 민족해방운동사’란 부제의 이 책은 폴란드인들이 1795년부터 1918년까지 124년에 걸친 압제의 터널을 거쳐 온 과정을 저자 특유의 적절한 감성 자극과 힘을 섞은 문체로 펼쳐 간다. 저자는 “미시적 실증 분석이라면 폴란드의 실증적 역사학자들에게 맡겨두어도 충분하다”며 “강 건너 불구경이라면 애초부터 폴란드 민족운동사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일성을 던진다. 한양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1999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소나무)라는 저서를 통해 20세기말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폐해를 비판해 화제가 됐던 인물.

임교수는 폴란드인들에게 민족이 무모한 용기의 원천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그들의 역사를 통해 추적해 간다.

“정통성 있는 국가권력이 부재한 상태에서 민족은 늘 국가의 이상적 대안이었다. 현존하는 국가가 부정의 대상이었다면, 그 대안으로서의 민족은 힘의 원천이자 사상의 영감이었다. 민족을 현실화시켜 기존의 국가권력을 대체하려는 열망은 민족운동의 정서적 뿌리였으며, 설사 운동이 실패한다고 해도 현실 국가체제의 피안에 있는 민족은 좌절한 지식인들이 자신의 재충전하고 새로운 운동의 영감을 얻는 정신적 고향이었다.”

이것은 바로 근현대사에서 민족이란 단어가 한국인들에게 주는 주술적 힘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민족의 마력이 1918년 폴란드의 독립 후 민중이 아닌 국가와 결합하면서 강력한 국가주의로 나간다는 것까지도 다르지 않다.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 상황에 의해 주어진 독립, 그래서 독립의 쟁취한 주도세력이 뚜렷이 존재하지 않고 독립국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도 존재하지 않았던 혼란의 시기. 강력한 국가를 건설이 시급한 과제로 주어졌고 그것은 민족에 기반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다민족으로 구성된 폴란드의 경우 국가의 응집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국가주의적 경향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임교수는 폴란드의 경우에 현실사회주의의 ‘국가―민족’ 개념이 역사적으로 파산했다고 평하며 아직 요원한 ‘민중―민족’으로의 길에 희망을 건다. 약자는 강자한테 지기 마련이라는 합리적 사고방식만 가지고 살았다면 지구상에서 이런 희망을 걸 만한 민족이 남아 있지 않으리란 것도 역사의 교훈이다. “‘민중―민족’이 현실화될 때, 그때야 비로소 폴란드 민족은 참 해방을 성취할 것이다.”

임교수는 우리의 역사를 직접 비교하기보다 폴란드의 민족해방운동사를 우리 역사의 반면(反面)교사로 제시한다. 험난했던 긴 역사를 돌아본 저자는 21세기 폴란드 역사가 미완의 해방을 완수하기를 기대해 본다.

▼'그대들의 자유, 우리들의 자유'/ 임지현 지음/ 아카넷/ 334쪽 1만8000원▼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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