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보의 옛날 신문 읽기]짐이 발(髮)을 단(斷)하노라!!

  • 입력 2000년 8월 12일 11시 07분


단발령에 수난당한 히피족
단발령에 수난당한 히피족
요즘 거리에는 ‘두발의 자유'가 넘실거립니다. 형형색색의 염색 머리, 남자들의 뒤로 묶은 꽁지머리, 스킨헤드를 연상시키는 빡빡머리까지.... 신문을 보니 어떤 벤처회사에서는 직원들이 머리염색을 하면 돈을 주기도 한다더군요. 어쨌거나 이제 ‘두발의 자유'는 그 어떤 자유보다도 자유스러운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두발의 자유'와 관련한 옛기사 한 편을 보고 있습니다. 1976년 6월16일자 동아일보 기삽니다.

▼장발자 출입금지 ▼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네거리. 장발 단속 첫날인 16일 전국경찰은 가두삭발 등 대대적인 강제 단속을 펴는 대신 계몽과 권유위주의 조용한 <장발 추방운동>을 벌였다. 치안본부는 단속에 앞서 15일 무리한 단속을 지양하고 적발된 장발자 가운데 공무원 직장인 학생 등 신분이 뚜렷한 사람에 대해서는 소속 기관장에게 통보, 조발토록 종용하고 다만 무직자 청소년 부랑아 등 히피성 장발족에 한해 조발을 권유, 조발 후 훈방하는 한편 이에 불응할 때만 즉심에 넘기도록 재차 지시했고 서울시경의 경우 16일 정오 현재까지는 한건의 장발단속 보고도 들어오지 않았다.

(중략)

명동 충정로 등 유흥업소가 많은 중부경찰서의 경우는 관내 이발소와 학교, 각 기업체 등에 전직원과 종업원들을 솔선 조발시키도록 권장하는 전단 8천장을 찍어 돌렸고 접객업소마다 <장발자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는 푯말을 문앞에 걸어놓도록 요망했다.(중략)

한편 단속에 앞서 많은 사람들은 머리가 별로 길지 않는데도 혹시 길가다 걸려 망신당하기 싫다면서 머리를 짧게 깎기도 했다. 이날 치안본부의 한 관계자는 이처럼 단속을 완화한 것은 장발추방령이 내려진 지난 한 달동안의 계몽기간 중 장발 풍조가 크게 개선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편 문교부는 16일 국민학교어린이들에 대한 장발단속을 중지하도록 각 시도교위에 긴급 지시했다. 문교부의 이같은 지시는 일부 국민학교에서 어린이들의 머리를 지나치게 깎도록 하는 등 과잉 단속에 따른 부작용이 많기 때문에 내려진 것이다.

(하략)>

▼고속도로 건설의 주역 `바리깡' ▼

76년이면 제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입니다. 교문에서 훈육주임한테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리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군요. 이런, 그러고보니, 지금 제가 ‘추억'이라고 썼습니까? 글쎄요, 그 모멸감, 그 수치심, 그 적개심 같은 것들마저 ‘추억'이 될 수 있을지....

70년대의 키워드 목록 가운데 하나로 ‘장발 단속'을 올린다면 어떻습니까. 언젠가 TV에서, 아마 ‘그때를 아십니까'류의 프로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70년대의 장발 청년을 고발하는 뉴스 꼭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흑백 자료 화면을 보니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더군요. 머리가 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청년들을 범법자처럼 경찰서로 잡아들여 바닥에 꿇어앉히고 바리깡으로 고속도로를 밀고....웃기는 것은 당시 방송기자의 멘트였습니다. 그 방송기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런 놈들이 이담에 사회에 나가 뭐가 될지 걱정입니다!'

▼차렷! 열중셧! ▼

당시는 유신, 긴급조치 시대였지요. 유신 파시스트들은 반공과 더불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엄격한 도덕률을 요구했습니다.(장발은 부도덕하고, 단발은 도덕적이라니!) 차렷, 열중셧 외의 행동을 하는 `것들'은 다 왕따시켰습니다. 그런 정서 속에서 젊은이들의 장발마저 화가 났던 겁니다.

그런데 다 아시는 얘기지만, 파시즘이 횡행하는 사회일수록 ‘거리에 침 뱉지 말자' ‘술 취하면 혼난다' ‘근검절약하자' 식의 캠페인을 즐겨 하잖습니까. 하여튼 당시의 반공제일주의는 고등학교 운동장마저 병정놀이의 마당으로 만들었고, 코미디같은 도덕주의는 나라 전체를 위선으로 뒤덮었습니다.

▼짐(朕)이 발(髮)을 단(斷)하노라▼

낡은 신문 스크랩을 옆에 두고 또 한편의 단발령(斷髮令)과 관련된 글을 읽고 있습니다. `짐(朕)이 발(髮)을 단(斷)하노라'로 시작되는, 1895년에 반포된 단발령입니다.

`짐이 발을 단하야 신민(臣民)에게 선(先)하노니 이유중(爾有衆)은 짐(朕)의 의(意)를 극례(克禮)하여 만국(萬國)으로 병립(竝立)하는 대업(大業)을 성(成)케 하라.....'

지금까지 단발령에 관한 우울하고도 집단무의식적인 추억 두 편이었습니다.

늘보<문화평론가>letitbi@hanmail.net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