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는살아있다]'지각대장' 존 "제게도 다 이유가 있답니다"

  • 입력 2000년 7월 21일 18시 33분


저는 지각대장 존입니다. 제가 왜 날마다 학교에 늦느냐구요? 보시는 대로입니다. 사자와 악어와 홍수가 제 앞길을 가로막잖아요. 못 믿으시겠다구요? 그건 사실이 아니라구요? 저희 선생님이야 못 보셔서 그렇다 치더라도 함께 보고 겪은 여러분까지 그러시면 섭섭하죠. 하지만 원망은 하지 않습니다. 학교길의 사자와 악어와 홍수를 너무나 생생한 현실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나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여기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니까요. 제가 이해해야죠, 뭐.

저를 만든 존 버닝햄 아저씨는 저처럼 사자와 악어와 홍수를 현실로 여긴 사람이랍니다. 그래서 보통 학교는 못 다니고 영국의 대안학교 섬머힐에 다녔죠. 짐작컨대 당시에는 정신이 이상하다는 소리도 좀 듣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보세요. 지금은 어떤가요. 영국 3대 그림책 작가 중 하나라는 등, 굉장한 칭찬을 들으면서 멋진 그림책들을 얼마나 많이 만드는데요. 눈에 보이는 현상만이 참된 현실은 아니라는 걸 이 아저씨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제서야 그걸 인정해주는 거예요.

말이 좀 어려워졌나요? 이해해주세요. 제가 워낙 생각이 많고 말을 쉽게 안 하는 편이거든요. 하지만 제가 꼭 강조하고 싶은 건 바로 ‘조화’입니다. 환상과 현실의 조화, 어른과 아이의 조화, 엄격함과 너그러움의 조화, 완전과 불완전의 조화, 글과 그림의 조화, 무채색과 유채색의 조화….

저는 제가 그런 조화에의 염원을 말없는 말로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알아차린 분은 시종일관 무표정한 제 얼굴, 심지어는 뒤통수에서도 짜증과 환희와 절망과 기대감 같은 것들을 읽어내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고릴라에게 붙잡혀 천장에 매달린 선생님을 “고릴라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거짓말하지 마세요”라면서 그냥 지나쳐 복수했다고 섭섭해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럴 때 짠! 선생님을 구해 드리면 얼마나 멋진 화해가 되겠느냐고요. 천만에요! 저는 오히려 제 방식으로 선생님과 화해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제가 되고 저는 선생님이 되고, 그렇게 서로에게 스며듦으로써 서로에게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는 거죠. 증거로, 그 다음 페이지를 보세요. 학교 가는 길의 풍경이 뭔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저는 그 날도 지각했을지 모릅니다. 선생님에게 또 벌을 받았을지도 모르구요. 하지만 약간의 분홍빛 희망은 얻었으니, 그걸 소중히 간직하고 계속 학교에 갈 겁니다. 계속 지각하면서 말예요.

김서정(동화작가·공주영상정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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