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창현/'열린 방송'이 통일 앞당긴다

  • 입력 2000년 6월 14일 19시 33분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역사적 만남을 전국민은 생방송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시청했다. 두 사람이 만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남한 주민들은 분단의 벽을 넘어 가슴 뭉클한 민족적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북한 주민들도 방송 화면을 보면서 함께 기뻐했으며 함께 가슴 벅차 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명히 방송은 이미 분단의 벽을 뛰어넘은 것이다.

지금까지 멀게만 느껴졌던 평양의 거리와 시민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왔으며, 베일에 가려져 있던 김위원장의 표정과 웃음을 통해 우리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방송은 우리를 평양의 창광거리로, 백화원 영빈관으로, 그리고 만수대의사당으로 안내했다. 이에 따라 우리는 평양 곳곳을 생생히 둘러볼 수 있었다.

이제까지 막혀 있었던 북한 사회가 방송 채널을 통해서나마 활짝 열린 것이다. 이른바 ‘녹화된 화면’을 통해 보아 온 북한의 모습과는 다른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생생한 북한 현실을 접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분단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방송은 통일을 지향하는 방송이기보다는 분단을 재생산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남북한 모두가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적대시하였으며 이를 국민의 의식 속에 담아내고자 방송을 동원해 온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방송에 비친 북한의 모습은 그야말로 ‘동토의 왕국’에 사는 ‘기아선상의 인민’들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사회로부터의 생중계 방송은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은 폐쇄된 북한 사회의 개방 의도를 시사함은 물론이고, 우리 방송이 갖고 있었던 분단의 흔적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계기도 됐다. 우리의 북한 관련 방송이 아직도 냉전적인 가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반성도 하게 된다.

동서독 통일 과정에서 방송은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동독과 서독은 분단 체제하에서도 자유롭게 상대방의 방송을 보면서 이질감을 해소했으며, 통일 이후에도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 회복을 위해 노력해왔다. 방송이 없었다면 독일 통일은 훨씬 뒤에 이뤄졌을지도 모르며 지금 같은 안정된 모습을 보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동독사람들이 교조적인 내용으로 가득 찬 동독의 방송뉴스를 외면하고, 사실적 보도를 해온 서독의 방송 뉴스를 시청하면서 통일이 가속화되었다는 점을 우리 방송인들이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방송 현실은 아직 이런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미흡한 부분이 많다. 우리의 방송은 북한 보도에 있어서 아직도 냉전적 가치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정주의적 보도경향을 보인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의 생방송 중계는 이제 통일 방송을 위한 대장정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제까지 55년이 넘도록 재생산돼 온 분단 의식의 골이 생각보다 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반 국민의 인식뿐만 아니라, 방송 제작 현장에 있는 기자와 PD의 인식에서도 발견된다.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이 때 방송의 주도적인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방송인 자신의 변화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우리는 생방송 중계를 통해 전달되는 북한 사회의 모습에서 엄청난 방송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은 생방송에서 오히려 가슴 벅찬 그 무엇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생방송의 정신으로 분단 방송은 종지부를 찍고 통일 방송으로 거듭나야 한다. 아울러 이제부터 방송은 단순한 역사의 기록자가 아니라, 방송 그 자체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주역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창현 (국민대 교수·방송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