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남찬순/국회의 '졸부 근성'

  • 입력 2000년 6월 9일 19시 02분


영국 의회나 미국 상하원 의원사무실에 가면 모서리가 닳은 책상을 쉽게 볼 수 있다. 국제적으로 명성이 난 의원의 사무실도 대부분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좁고 허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들은 “내 책상은 몇십년 전 누가 사용하던 책상”이라며 오히려 그 ‘역사성’을 자랑한다. 미국의 백악관이나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에 있는 영국총리 관저 역시 마찬가지다.

▷작년에 4억9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의원사무실 집기를 교체한 국회가 이번에 다시 4억5000만원 어치의 집기를 새로 구입하는 모양이다. 국회측 설명으로는 98년부터 시작된 사무자동화 작업의 일환이라고 한다. 현재의 집기는 89년에 들여온 것이라서 컴퓨터 설치에도 어려움이 있고 해서 약 13억원의 예산으로 이 같은 교체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16대 국회는 의원보좌관까지 1명이 더 늘어나 사무실 공간의 재배치가 불가피하다는 설명이다. 작년에 국회에서 나간 집기는 국방부와 교도소 등지에서 재활용되고 있고 올해도 부처간에 흔히 있는 그 같은 관리전환을 하겠다는 것이다.

▷국회측은 이처럼 집기교체작업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흥청망청 국회’라는 비난이 왜 나오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국회는 명확한 법적 근거도 없이 전직 의원들에게 연금성 돈을 1년에 30억원씩 변칙 지급하는가 하면 타 기관보다 엄청난 60억원의 예비비를 헤프게 쓰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최근에는 16대 국회 진출에 실패한 의원들이 국회 돈 6000만원으로 외유를 해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그 돈은 모두 국민의 혈세에서 나가는 것이다.

▷멀쩡한 집기를 바꾸는 것은 국회의 낭비습관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불편하면 고쳐서 쓸 수도 있는 일이다. 영국이나 미국 의회가 옛 책걸상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해서 사무자동화가 안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래된 것일수록 값지게 생각하고 아낄 것은 최대한 아끼는 그들의 합리주의 실용주의는 우리 국회가 꼭 배워야 할 덕목이다. 무조건 새것으로 바꾸어야 직성이 풀린다면 그것은 바로 ‘졸부 근성’에 지나지 않는다.

<남찬순논설위원>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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