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정국/"돈주면서 北공연 할것까지야"

  • 입력 2000년 4월 19일 19시 14분


북한에 들어가서 공연하고 돌아오는 것이 큰 자랑거리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최근 필자는 뮤지컬 ‘명성황후’의 연출자인 단국대 윤호진교수에게 민족적 리얼리티를 잘 담아낸 ‘명성황후’를 평양에 가서 한번 공연해볼 계획이 없느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윤교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우리는 그렇게 돈을 줘가면서까지 평양 공연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잘라 말했다. 윤교수의 이 말에는 국내외에서 인기 높은 ‘명성황후’를 오히려 돈까지 줘가며 애걸복걸해 평양에서 공연할 생각은 없다는, 자존심 상해서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뜻이 함축돼 있는 듯했다. 우리 문화 예술 단체들이 북측과 민간 차원의 교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건당 100만 달러(약 12억원) 안팎의 거액을 공공연하게 북측에 건네는 현실에서 윤교수의 이 고집은 오히려 신선해 보였다.

근래 우리 문화예술계에는 거액의 돈을 들여서라도 평양을 다녀와 이를 과시하려는 단체나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지난해 12월 방송사들이 대중가수들을 끌고 가서 경쟁적으로 평양 공연을 갖더니, 이달 초에는 클래식 음악가들이 참가하는 평양 국제음악회가 개최되려다 성사되지 못했다. 북측이 남한의 공연기획사에 평양공연 대가 100만달러 외에 서울공연 대가를 더 요구하다 결렬된 것. 이 과정에서 베이징에서 입북을 기다리던 공연관계자들과 일반관객 60여명은 며칠씩 공항에서 대기하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헛수고를 해야 했다.

문화계 안팎에서는 민간 차원의 남북 문화 교류가 무분별하게 경쟁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에서 이같은 문제가 터져 나오자 적지 않은 우려와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문화 교류를 마치 물건값 흥정하듯 해서야 되겠느냐” “북한에서 공연한다고 금테 두르느냐” 등 부정적 여론이 끓고 있는 것이다.

이러던 차에 남북정상회담 발표가 나왔다.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긴장해소의 가시적 성과로 문화 분야의 교류가 가장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지만, 현재와 같이 돈거래가 전제된 1회성 행사 위주로 교류가 계속된다면 ‘민족 문화의 동질성 회복’과 ‘정서적 유대감 형성’이라는 문화 교류 본래의 효과는 전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정상회담 이후 문화 교류의 주조는 민간 차원에서 당국자간 합의를 바탕으로 한 정부 차원으로 넘어갈 것이다. 양측 당국자는 민간의 자율적인 교류는 계속 허용해야 하겠지만 ‘문화적 통일을 통해 체제의 차별성을 해소해나간다’는 원칙 하에 과시적인 일회용 행사들은 차제에 정비해야 할 것이다.

특히 문화 교류를 볼썽사납게 만드는 돈거래는 배격돼야 한다. 혹 북한 경제 사정의 어려움을 감안해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는 문화 교류를 왜곡시킬 뿐이다. 경제 문제는 경제 분야 교류에서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양측 당국자는 ‘남북 문화예술용어 사전’ 편찬, 박물관 소장 고미술품 교환전시, 판문점 창작음악제 등 서로의 이해를 통해 분단장치를 해소하면서 민족 문화의 동질성을 확보해나갈 수 있는 교류부터 우선 추진해야 할 것이다.

윤정국<문화부차장> jk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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