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金대통령의 '조바심'

  • 입력 2000년 3월 24일 19시 33분


2000년대는 속도의 시대다. 빌 게이츠의 말이다. 디지털세상이 펼쳐지면서 속도가 가치를 창출한다. 돈을 만든다. 세계도처에서 벤처의 열풍이 불고 벼락부자들이 탄생한다. 속도를 내는 궁극적 이유는 뭔가. 그것은 여유와 느림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정진홍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는 자신의 책에서 말한다. 속도를 내어 확보된 느림을 즐기고 새로운 창조의 모태를 만드는 것이 ‘속도의 미덕’이라는 것이다. 속도를 위한 속도는 의미가 없다. 느림이 없는 속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가. 모두들 과속이다. 공식적인 총선운동이 시작도 되기 훨씬 전부터 내달리고 있다. 돈 뿌리기, 지역감정 자극하기, 상대방의 옛날 약점 들춰내기, 막말로 비방하기가 한계를 넘고 있다. 정책적인 이슈를 놓고 벌이는 여야(與野) 대결에 행정부가 끼어 들어 2대 1의 싸움이 되어버렸다. 그만큼 가열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가속화의 중심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있다는 사실이다.

▼ ‘질책의 홍보술’▼

재정경제부를 비롯한 관련 행정부처가 국가채무와 국부(國富)유출 등에 대한 광고를 요며칠간 일간지에 계속 게재한 것도 김대통령의 질책과 독려 때문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엊그제 국무총리에게 공문을 보내 이같은 광고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으니 대통령으로서도 참으로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관권개입의 소지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요즘 김대통령의 언행을 보면 대통령이 이번 선거결과에 매우 조바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김대통령은 며칠 전 재경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한나라당이 제기한 국가채무 400조원 주장과 국부유출문제에 대해 주무부처인 재경부가 왜 적극적인 방어에 나서지 못하느냐며 엄하게 질책했다. 이헌재 재경부장관을 비롯한 간부들이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왕조시대의 어전(御前)회의만큼이나 분위기가 무거웠던 모양이다.

김대통령은 이날 작심을 하고 질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여당의 대응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으니 행정부가 직접 나서라는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다. 한편으로는 질책 장면을 그대로 언론에 공개하여 그 자체로 대(對)국민 홍보의 극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다. ‘질책의 홍보술’이라고나 할까.

대통령의 선거개입시비를 불러일으킨 또 다른 예는 이번 주초 이인제 민주당선거대책위원장과의 조찬회동을 들 수 있다. 선거법상 대통령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정부여당측은 민주당총재이기도 한 대통령이 당무를 보고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야당측의 선거개입 시비를 물리쳤다.

재미있는 것은 4년 전의 신문스크랩을 찾아보면 요즘과 똑같은 공방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단지 주인공만 바뀌었을 뿐이다. 96년 초, 15대 총선을 70여일이나 앞둔 상황에서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총재는 “김영삼대통령은 국사보다 선거운동에 더 몰두하고 있고 국정의 총 본산인 청와대는 특정정당의 선거운동본부가 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측은 “김대통령은 당총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되받았다.

김대통령은 이번 총선에서 제1당이 돼야만 총선 후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정계개편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남은 3년간의 안정된 국정운영은 물론 퇴임후의 상황도 고려할 수밖에 없는 김대통령으로서는 이번 선거결과에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현재의 상황은 밝지 못하다. 우선 ‘동진(東進)정책’의 실패로 영남권 진출이 어렵게된 데다 민국당이 예상과는 달리 부산 경남지역에서조차 뜨지 못하고 여론조사결과도 민주당이 한나라당에 뒤지는 판세다.

▼어떤 승리냐▼

김대통령이 여야의 선거공방전 한가운데로 휩쓸려있다고 해서 민주당 당적을 버리거나 명예총재로 한발 물러나서 중립을 지키라는 비현실적인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대통령이 여당 총재로서 총선승리에 집착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떤 승리를 하느냐는 것이다. 의석 수에 관계없이 찜찜한 승리보다는 깨끗하고 당당한 싸움이 김대통령에게 더 큰 힘을 실어주지 않을까. 모두들 표를 향해 속도를 내더라도 누군가는 좀 떨어진 위치에서 살필 것은 살피고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그 사람은 마땅히 대통령이어야 한다. 총선 후 더 빠른 속도를 내기 위해서도 지금은 느림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어경택<논설실장> 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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