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방형남/'금속활자 교훈' 되새기자

  • 입력 2000년 3월 6일 19시 29분


미국 아메리칸 대학의 개리 위버 교수는 ‘무엇을 하는가(what they do)’와 ‘어디에 속하는가(where they are)’라는 기준으로 선후진국을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무엇을 하는가’를 강조하는 국민성이 미국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미국인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나는 무슨 일을 하는 누구”라며 “당신은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위버는 이런 자세 때문에 미국인이 자립과 성취감을 중요시하고, 사업을 하다 실패하면 더 열심히 하지 못해 경쟁에서 진 데 대한 자괴감을 느낀다고 분석한다. 그는 미국이 첨단 비즈니스에서 앞서고 정보화 시대에도 최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이같은 국민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면 후진국 사람들은 “나는 어디 출신이며 누구의 아들”이라고 소속을 강조한다.

위버의 기준에 따르면 요즘 한국은 미국에 가깝다. 안정된 소속인 직장을 박차고 나가 ‘자신의 무엇’을 찾아 벤처를 만드는 젊은이들이 폭증하는 현상이나 인터넷 열풍은 미국의 복사판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 열풍은 여간 고무적인 게 아니다. 1월말 현재 한국의 인터넷 사용자는 1134만명으로 전국민의 24%나 된다. 인터넷 이용자가 1000만명을 넘는 국가는 전세계에서 6개국에 불과한데 한국은 그중에서도 캐나다(43.3%) 미국(40%)에 이어 보급률 3위를 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장차 미국같은 선진국이 될 것인가. 정보화 관련 통계가 나올 때마다 필자는 94년 브뤼셀에서 만났던 앨 고어 미국 부통령의 고언이 떠오른다. 고어는 정보 고속도로 G7 정상회담’ 개막연설에서 부끄러운 한국의 과거를 거론했다. 그는 “한국은 13세기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으나 그 발명품을 왕실책자와 불경, 중국의 고전을 간행하는데만 사용했다. 반면 유럽에서는 구텐베르크가 200년 늦게 금속활자를 만들었으나 학술서적 등 실용적인 책자 인쇄에 활용해 찬란한 서구문명을 꽃피우는 발판으로 삼았다. 현대인들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얘기하지, 한국의 금속활자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민족. 미국인 못지않게 인터넷에 몰두하는 민족. 이들이 닮은 꼴이듯이 혹시 고어의 고언과 짝을 이룰만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파리10대학 박사과정 학생인 파브리스 고티에가 이런 걱정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는 한국 인터넷 열풍의 실상을 보면 실망하게 된다며 “한국인들은 인터넷을 쇼핑 오락 채팅 같은 단순한 목적을 위해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PC방들이 대부분 오락과 채팅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된다며 이것은 첨단기술을 오용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인터넷 열풍을 선진국 도약의 계기로 삼으려면 ‘금속활자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미국이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망신을 당한 뒤 ‘리멤버 펄하버(remember Pearl Harbor)’를 외쳐 결국 일본을 패퇴시켰듯이 누군가가 나서 ‘리멤버 금속활자’를 외칠 때가 됐다.

<방형남 국제부 차장>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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