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서현/세상을 모르면 예술을 말라

  • 입력 2000년 3월 1일 19시 31분


베토벤이 그려낸 자신의 모습은 그런 것이었다. 베토벤은 민중의 해방자로서의 나폴레옹에게 교향곡까지 헌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다. “내가 대위법을 아는 만큼 전쟁을 할 줄 안다면 나폴레옹을 무찔러 버릴 텐데.”

여러 멜로디를 겹치며 화음을 이뤄나가는 대위법은 작곡의 기본기. 우선 주목할 것은 체계적 교육을 통해 베토벤이 갖춘 기술적 능력이다. 자신 있게 구사하는 기본기, 기술은 예술의 세계를 이뤄내기 위해 갖춰야 할 능력이다.

그러나 예술이 기술을 넘어서게 하는 요소는 상상력과 세상을 보는 눈이다. 베토벤이 영웅교향곡으로 보여준 것은 하이든, 모차르트의 음악세계를 폭발적으로 뒤집는 상상력이다. 그리고 해방자와 독재자를 뚜렷이 구분하고 분노할 줄 알던 성찰의 깊이다.

▼통찰력-철학 빠지면 기술일뿐▼

그런 능력에 기초해 베토벤은 자신의 직업세계를 바꿨다. 귀족들의 식사시간에 쓸 식사음악을 작곡하던 피고용인의 모습을 바꾼 사람이 바로 베토벤이다. 작곡기술자가 아니고 작곡가라는 직업을 확립해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악보를 팔아 생활해 나갔다. 일 주일에 한 곡씩 미사음악을 작곡해 교회에 바쳐야 하던 시대가 지나갔다. 미사가 아닌 연주회에서 연주될 새로운 미사곡의 시대를 베토벤이 열었다. 음악세계는 그렇게 발전했다.

이제 문화의 세기가 되리라던 그 시대가 왔다. 문화도 상품이니 팔아서 부자가 되자고 한다. 빈 콤팩트디스크 한 장의 가격은 2000원 남짓 하지만 베토벤의 교향곡이 담기면 값이 대여섯 배로 뛴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인쇄술의 발명, 산업혁명과 맞먹을 영향력을 지닌 새로운 기술의 시대도 함께 왔다. 컴퓨터 게임과 애니메이션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기술이 제대로 된 문화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베토벤의 시대와 달라진 바가 없다. 우선은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 깔려야 할 것은 인간이 쌓아온 역사와 철학에 대한 통찰력이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묶어 부르는 이름이 바로 인문학적 깊이다. 작곡의 기본이 대위법이면 문화의 기본은 인문학이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충무로에서 영화의 잔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선행돼야 할 것이 인문학적 깊이를 갖는 것이다. 그 성찰의 깊이를 보여주는 영화라야 경쟁력 있는 문화 상품이 되고 고전으로 남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영화감독은 영화제작 기술자에 불과할 뿐이다. 세계를 제패하는 일본 만화의 문화적 힘은 데생 능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눈을 동그랗게 하는 상상력과 뚜렷한 가치관에서 나온다. 이 땅에서 영화 만화 광고 건축에 모방과 표절의 부끄러운 입씨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제품이 아닌 작품이라면 작가가 세상에 펼쳐 보이는 것은 당연히 독창적인 것이어야 한다. 작가가 발표한 것이라면 당연히 독창적인 것이라고 믿어줄 수 있는 세상도 되어야 한다. 그 믿음의 바탕이 바로 작가와 사회의 인문학적 깊이다.

▼자신의 눈으로 변화 추구해야▼

건축가가 공원을 설계하는 데 철학자가 이론적 배경을 마련해주며 해체주의 건축을 탄생시키는 것이 유럽의 문화적 힘이다. 그러나 모방과 로비와 담합의 뒷소문만 항상 무성한 것이 이 땅의 건축계의 우울한 현실이다. 건축설계사라는 해괴한 단어가 횡행하는 것이 우리 건축문화의 단면이라면 그 짐을 덜어야 할 책임은 건축가들 자신에게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인문학적 깊이의 책임은 사회에 공통으로 있다. 새로운 기술의 시대에 고시와 벤처 밑에 묻혀 있는 인문학의 위기 의식은 그래서 더 두렵다.

컴퓨터 게이머라는 새로운 직업도 생겼다. 기술과 재주로서의 컴퓨터 게임만 이야기된다면 컴퓨터 게임은 문화 속에 자리를 잡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컴퓨터 게임을 바꿔 나갈 수 있는 상상력이다. 이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성찰하는 능력이다. 그제서야 우리는 ‘게임기술자’가 아닌 ‘게임가’라는 이름도 붙여줄 수 있다. 문화가 넓어지고 깊어진다.

듣고 싶다. “내가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만큼 선거전을 안다면 그 지역색 조장하는 정치인들을 무찔러 버릴 텐데.”

서 현(건축가·한양대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