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최규철/페리의 '중국訓手'

  • 입력 2000년 2월 24일 19시 40분


미행정부 대북정책조정관 윌리엄 페리박사가 북한과의 ‘평화협정’ 체결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로 관심이 쏠리게 된 지난 주말 문제의 로스앤젤레스 연설회장에 기자도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지금까지 북한이 요구해온, 남한을 배제한 미-북간의 ‘평화협정’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페리박사는 18일 저녁 로스앤젤레스 라디슨윌셔호텔 연회장에서 이 지역 민간단체 PCI(Pacific Century Institute)가 수여하는 제1회 가교상(架橋賞·Buildin-g Bridges Award)을 받았다. 북한문제처리에 기여한 공로가 수상이유다. 도널드 그레그 전주한미대사, 데사이 앤더슨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사무총장, 연세대 문정인(文正仁)교수, 일본 게이오(慶應)대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교수 등 300여명의 태평양국가 각계 인사들이 식장을 메웠다.

페리박사(스탠퍼드대 학사 석사과정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수학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안보와 기회’라는 수상연설주제를 시간적으로 10년 이내, 지리적으로 태평양지역, 제목은 안보라는 식으로 인수분해(因數分解)하듯 논리적이면서도 쉽게 설명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는 94년 3월부터 6월까지 당시 국방장관으로서 맞았던 북한 영변핵처리시설로 인한 한반도 위기상황을 회고하면서 미국은 대북 군사작전계획까지 수립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 대목에서 페리박사는 동석한 전미공군참모총장 로널드 포글먼장군의 이름을 거명하기도 했다. 그는 북한을 불안정한 파트너라 부르면서 페리보고서의 배경을 요약했다. “지난해 대북정책조정관일을 맡으면서 북한을 방문했다. 이어 한국과 일본지도자들을 만나 협의한 결과 강경책보다는 포용정책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게 됐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평화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대북정책은 두 갈래길이다. 먼저 포용이다. 그러나 북한이 응하지 않을 땐 강경책이다.” 그는 강경책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밝히지 않았지만 북한이 최근 미국의 대북 노력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러나 그가 정작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중국문제였다. 연설을 시작하자마자 미중관계 장래를 걱정했다. 중국문제에 대한 그의 비관론은 사실 뜻밖이었다. 그는 중국경제의 침체, 대만문제, 지난해 빈손으로 끝난 주룽지(朱鎔基)총리의 방미, 미군사기밀유출의혹, 베오그라드 중국대사관폭격사건 등 일련의 저해요인을 설명했다. 그리고는 현재의 미중관계는 중국이 대만해협에 미사일발사훈련을 했던 96년보다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또 미국과 일본이 추진중인 전역미사일방어체제(TMD)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페리를 잘아는 사람으로부터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실제로 그는 더 심각하게 비관하고 있지만 충격을 줄 것 같아 발언수위를 내렸다는 것이다. 페리의 걱정은 24일자 본보 국제면(A11면) ‘中 대만에 무력사용 땐 美군사개입검토’ 기사에서 그 단면을 드러냈다.

세계 유일초강대국 미국은 지금 왜 중국문제를 놓고 부심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우리의 외교반경과도 직접 부닥치는 부분이다. 한미, 한중관계는 잘 나가고 있으니 우리가 걱정할바 아니라고만 할 일인가. 만약 미중관계가 악화될 경우 한국의 위치는 어디인가. 중국과 남북한과의 관계, 미중관계가 현재 진행중인 한반도 4자회담에 미칠 영향을 페리가 모를 리 없다. 페리박사는 미정부가 여러 제약요인을 감안하여 장기적인 안목에서 정책을 수립해야한다고 주문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10년을 내다보는 대외정책에 대한 연구는 과연 있는가. 페리는 우리에게도 ‘중국훈수(訓手)’를 둔 것인지, 무슨 메시지를 담은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페리연설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그날 아침 모스크바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스위스를 거쳐 로스앤젤레스까지 날아왔다. 리셉션장에서 “연설도중 졸지나 않을지 걱정된다”고 농담을 했던 페리박사는 연설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코피를 쏟았다. 연설료도 마다하고 자비로 그곳까지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모두가 연설을 마치고 나가는 73세의 페리박사에게 오랫동안 기립박수를 보냈다.

최규철<심의실장>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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