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은 버리고 가자]독버섯처럼 번지는 '사이버폭력'

  • 입력 1999년 12월 12일 19시 47분


올해 방송연예계는 어느 해보다 쑥밭이었다. 주범은 인터넷이었다. 동료 탤런트 오현경은 은밀한 사생활이 인터넷 상에 공개돼 다시는 컴백할 수 없을 정도로 연예인으로서는 ‘불구’가 됐다. 전 MBC앵커 백지연씨는 금쪽같은 아들이 전 남편의 자식이 아니라는 무책임한 루머가 사이버 공간에 제기된 후 이를 뒤엎기 위해 5개월간 법정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전세계를 리얼 타임으로 잇는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혁명은 분명 ‘프로메테우스의 불’에 비견될 정도로 인류의 생활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요즘 사이버 공간에서 익명성을 무기로 개인에 대한 무책임한 음해와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디지털 혁명은 또다른 불행도 갖고 오는 것 같다. 나는 감히 이를 세기말의 인권침해로 규정하고 싶다.

최근 자수한 이근안 전 경감으로 대표되듯이 이전의 인권침해는 정권이나 체제 보존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최근 사이버 공간에서 자행되는 인권침해는 그러한 ‘특별한 목적’도 없이 심심풀이로, 레포츠처럼 이루어진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최근 연예인 400여명의 합성포르노를 사이버 공간에 유포하다 적발된 한 대학원생의 “별 생각없이 그저 돈이나 벌어보려고 했다”는 말은 그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들은 아직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민주시민의 행동 양식을 제대로 몸에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닐까.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민주사회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개개인의 시민들에게 충분한 소양과 양식이 제대로 전파되지 못했다는 얘기다.

더욱이 디지털 혁명은 그 놀라운 전파 속도에 비해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데 별다른 지적 도덕적 소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저 몇시간의 기술적 훈련만 받으면 디지털 혁명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미 수천만명으로 확산된 네티즌들에게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식의 전근대적인 계몽은 먹힐 리가 없다.

역설적이지만 사이버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서는 디지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일부 교양있는 네티즌들의 ‘양심 운동’만으로는 벅차다. 최근 인텔 펜티엄Ⅲ 프로세서에 고유 번호를 장착해 이러한 범죄를 행한 사람을 추적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국가 차원의 움직임은 당연히 필요하다. 최근 정부는 ‘사이버 범죄 특별법’을 마련해 각종 인터넷 관련 범죄에 대해 여러 차원에서 죄를 묻겠다고 했다는데 이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제도적 장치에 더해 국제적인 연대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내 연예인 포르노를 재미교포가 만들어 보낼 수 있는 인터넷은 이미 그 용어에서부터 국경의 개념을 떨쳐냈기 때문이다.

지금 인터넷과 관련된 당장의 고민은 ‘Y2K’일테지만 이는 철저한 준비로 밀레니엄 전후 며칠만 잘 넘기면 될 일이다. 하지만 사이버 인권침해는 이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할 경우 새 밀레니엄 내내 디지털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신종 ‘AIDS’로 등장할 것이다.

김혜수(영화배우 겸 탤런트·SBS TV ‘김혜수 플러스 유’ 진행

자)

*다음 필자는 환경운동가인 서울대 김상종(金相鍾·미생물학과)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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