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

  • 입력 1999년 5월 18일 19시 37분


르 클레지오는 데뷔할 때의 나이 스물세살에 영원히 멈춰선 것 같았다. 12일 파리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만난 그는 쉰아홉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만큼 캐주얼한 차림이 잘 어울렸다. 큰 키에 울림이 깊은 목소리. 그러나 말수는 적었다.

“오래 전 제가 살던 니스에서 백남준씨를 만난 일이 있죠. 그분에 대한 인상이 강렬했기 때문에 한국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63년작 ‘조서’로 르 노도상을 수상하며 프랑스 문단에 화려하게 떠오른 작가. 그러나 그는 파리 사교계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66년부터 프랑스를 떠나 태국 멕시코 파나마 등을 떠돌며 ‘비 유럽인’처럼 살았다. 특히 파나마에서는 69년부터 5년간 인디언들과 더불어 살았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양의 모리셔스 출신인 그는 금발의 백인이지만 태생부터 ‘아웃사이더’였다.

이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물질적 황홀’(67년)‘도피의 서’(69년)‘저편으로의 여행’(75년)‘어린 나그네 몽도’(78년)‘황금을 찾는 사람’(85년)‘섬’(95년)‘황금물고기’(97년) 등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들 중 우리 독자들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홍수’(66년)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국작가들 중에는 이 작품을 통해 현대 프랑스문학과 그 철학적 사유에 입문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문학평론가 남진우)

프랑스 바깥에서 그가 띄워보낸 글들은 프랑스 현대문학의 우뚝 선 산맥이 되었다. 태양의 이미지가 반복되는 그의 소설들. 늙고 노쇠한 유럽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날 것으로서의 생명’을 되찾기 위해 아프리카와 타히티로 떠났던 한 세기 전의 선배 시인 랭보와 화가 고갱을 정신사적으로 계승한 듯하다. 그러나 그의 ‘다른 세계로의 도피’는 이들보다 더 자연회귀적이며 일면 동양철학과도 맥이 닿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불교의 선(禪)에도 관심이 있지만 그보다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호흡방식에 깊은 유대감을 느낍니다. 제 고향인 모리셔스에는 ‘눈에는 경계가 없다’는 속담이 있지요. 자연과 내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평생 여행을 삶의 일부분으로 삼아온 클레지오. 이번 여름도 미국에서 보낼 계획이다. 어디를 가든 전속사인 갈리마르에 연락처를 남길 뿐 인터넷시대에 그 흔한 E메일 주소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다. 정보화사회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가 아니다. “문학은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이 주는 정보 이상의 것을 가르쳐주는 좋은 방식”이라는데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것은 커다란 의미의 자연입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벌레처럼 작은 존재일 뿐이죠. 문학을 통해 인간을 그 세계의 심연에 가 닿게 하는 것이 바로 작가입니다.”

르 클레지오는 2000년 한국의 대산문화재단이 세계적 작가를 초청해 마련하는 ‘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할 계획이다. 그는 한국 고유의 신화가 있는가를 물은 뒤 첫 방문 전에 꼭 한국의 단군신화에 관한 책을 읽고 오겠다고 말했다.

데뷔작 ‘조서’를 비롯해 그의 책 15종이 한국어로 번역돼 있다.

〈파리〓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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