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

  • 입력 1998년 12월 31일 18시 06분


1

먼곳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발 뒤꿈치를 시멘트 바닥에 자신있게 내리박는 것 같은 소리다. 마지막 순회 점검을 오는 당직주임의 발소리가 틀림없었다.

근무중 이상무!

하는 바깥 초소 근무자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는 두 개의 철문을 지나야만 이쪽 사동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깨를 단단히 여미고 있던 솜이불 자락을 젖히고 일어나 앉았다.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새벽의 싸늘한 냉기가 등덜미를 쓸어 내렸다. 나는 취침할 때마다 두툼한 털 양말 위에 신던 큼직한 덧버선을 벗고 양말을 잘라서 만든 모자를 벗었다. 양쪽 가슴에 사동 방 번호와 내 번호 표가 붙어있는 수의(囚衣)를 입었다. 1444번이 나의 오랜 이름이었다. 나는 이름을 거의 잊어버렸다. 이 번호를 언제 받았던가. 점호 때마다 이 이름으로 확인 당했고 편지를 받을 때에도 작업장에서도 면회를 갈적에도 모욕을 받거나 기합을 당할 때에도 욕설끝이나 앞에 이 번호를 달고 자신의 존재를 부여받았다.

앉은뱅이 책상을 딛고 일어나 밤이나 낮이나 켜있는 형광등에 가려 놓았던 종이를 늘어뜨렸다. 이건 스물 네 시간 수인의 행동을 관찰하도록 되어있는 규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언제나 백주 대낮이 계속되는 셈인데 어차피 낮에도 햇빛은 들어오지 않는다. 라면 박스를 뜯어서 보기좋게 편지지를 붙이고 형광등이 들어 있는 상자의 플라스틱 창에 테이프를 붙여서 건다. 상자의 위쪽에다 나무젓가락을 꺾어 붙여 실을 걸쳐서 이 차광판을 올리고 내리게 해두었다. 물론 검열이나 감사 때에는 이런 편리한 장치들을 모두 떼어 버려야 하지만. 이 방안의 물건들은 거의 내가 또는 동료들이 틈틈이 만든 것들이었다.

이불을 개어 모포들과 함께 발치에 쌓아 두고 세 칸으로 접게 된 국방색의 스펀지 매트리스는 네모 반듯하게 접어 방석으로 남겨두었다. 오늘은 냉수마찰을 하지 않을 작정이다. 어제 폐방(閉房)하고 나서 세면도구 주머니 두개에 내가 간직하고 싶던 물건들을 추려서 징역 보따리를 꾸렸다.

나는 일어섰다. 한번 기지개를 크게 켜고 늘 하던 것처럼 양 팔을 벌려 좌우의 벽에 활짝 펼친 손바닥을 붙여 힘을 주어 밀어내 본다. 시멘트 벽에는 성에가 하얗게 끼여 있다. 천장에도 내가 밤새 누워서 뿜어낸 입김으로 늘 그 자리에만 물방울이 맺혀 있다. 이 방은 가로는 나 혼자 눕는 매트리스를 깔고 나면 벽까지 두 뼘이 남고 세로는 발치에서 한 걸음쯤 나가 여기서는 뼁끼통이라는 변소의 문에 닿는다. 변소 앞에 물통을 놓았고 그 위의 벽에 사물이나 식기를 얹는 세 칸 짜리의 플라스틱 선반을 걸어 두었다.

물통에는 살얼음이 끼여 있었다. 오늘은 세숫대야에 물을 세 바가지나 부어 놓고 털이 한오라기도 없는 뺨이며 턱이며 목덜미를 닦았다. 나는 어제 목욕도 했고 이발에 면도까지 했다. 소지에게서 따뜻한 물을 한 바께쓰 얻어 세면장 사용을 허가받아 찬물을 타서 미지근한 물로 목욕을 했던 것이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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