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 (27)

입력 1998-11-19 19:16수정 2009-09-24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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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反政)④

남의 실패를 사전에 막아주는 대신 자신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야만 하는 앞서가는 선배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승주와 비슷한 생각을 품은 한 영업부 선배가 있어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술집을 차린 모양이었다.

술은 사올 때는 현금이었고 팔 때는 외상이 많았다. 그런 술집은 대개 마담을 보고 찾아오는 단골손님의 외상에 의해 꾸려지는 법이었던 것이다. 선배는 마담을 관리하기는커녕 그녀가 불편해 할까봐 그 앞 건물의 사우나 같은 곳으로 가는 등 자주 자리를 비워주었다. 마담은 받을 길 없는 엄청난 액수의 외상장부만 남긴 채 도망쳤고 선배는 쫄딱 망했다. 그 외상고 안에는 마담이 불려적어 챙긴 것도 적지 않았다.

남들의 실패담을 들려주며 승주는 으레 자기한테 맡기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고 결론을 내리곤 했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늘 남이 맡아주었으면 하고, 남이 하는 일은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승주의 직업관이라면 직업관이었다.

승주의 사업 구상은 결혼과 더불어 잠잠해지는가 싶었다. 모델이니 중역 비서니 애인 중에 예쁜 여자가 꽤나 많다고 떠벌렸고 그 말의 70퍼센트쯤은 사실이기도 했지만 막상 승주의 아내가 된 여자는 결코 미인이 아니었다. 맹장염인지 뭔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수술 때문에 잠깐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던 승주는 심심한 김에 간호사에게 몇 마디 수작을 걸었다. 막간을 이용하는 가벼운 기분이었고 평소 실력의 반의 반도 동원하지 않은 간단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여파는 만만치 않았다.

그는 그 병원의 개원 이래 단기 입원환자 중 여성 방문 최다라는 아까운 기록을 보유하고도 그 방문객 중 누구와도 다정한 말 한마디 나눌 수가 없었다. 팔뚝이 굵은 한 간호사가 마치 마피아의 정체를 폭로할 법정증인을 보호하듯 철저히 그의 신병을 보호했던 것이다. 승주는 단단히 코를 꿰어 그 씩씩한 간호사와 결혼해야만 했다. 마음약한 그는 그다지 길게 반항하지도 않았다. 간호사의 알뜰한 생활력 안으로 순순히 제 운명을 구겨넣었다. 대신 자신은 운명적 사랑을 이룰 수는 없나보다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결혼 뒤에도 여자만 보면 꼬리가 흔들리는 제 버릇을 개에게 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고백임을 모르는 사람은 그의 아내와 장모뿐이었다.

우리는 서진 룸살롱 사건 때나 용팔이 사건 때도 오랜만에 신문을 열심히 읽으며 두환을 걱정했다. 그러나 승주의 결혼 때는 두환의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결혼에 관해서라면 군대나 취직과 달랐다. 그것은 두환의 문제이기에 앞서 소희의 문제였던 것이다. 우리는 아무 약속도 안 했으면서도 펜팔 전시회날 이후 한 번도 소희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속이 검은 놈들이라도 순정만은 깊이 간직하고 싶은 법이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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