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16)

입력 1998-11-06 19:06수정 2009-09-24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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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유 ⑨

정학이 풀리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또다른 비상체제에 돌입해야 했다. 우리 같은 교칙 범법자 집단에게 펜팔 전시회를 맡기지 않겠다는 통보가 전달되었던 것이다. 빠른 시일 안에 서클룸을 뺏기리라는 얘기도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전시회를 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전시할 편지도 많지 않은 데다 전시회장을 꾸밀 만한 비용도 없었다. 학교측에서 전시회 보조금을 주는 것은 지도선생이 교무실 안에서 콧김깨나 뿜는 문예반과 서예반, 미술반뿐이었다. 방귀 엮듯이 어찌저찌 해서 전시장을 갖춘다 해도 그 꼬락서니가 어떨지는 너무나 뻔했다. 창피당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조건이었다.학교의 허가가 나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다.

조국은 그 처사에 몹시 흥분했다.

“이것은 이 조국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야! 조국의 명예를 기필코 수호해야 한다!”

라고 외치며 때아닌 애국심을 자극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승주도 포기하고 싶진 않은 듯했다.

두환은 담배만 피우고는 어느틈에 가고 없었다.

“중국집이나 분식센터를 빌려서 전시회장을 만드는건 어때?

“그래. 야전전축 하나 갖다놓고. 승주 네가 생음악도 좀 틀어가면서 말야. 입장료 받아도 되겠다.”

“아예 장사를 할까? 티켓을 만들어서 미리 팔자구. 그럼 장소 빌리는 비용 빠지고 좀 남을 것 같은데?”

“그걸로 펜팔부 기금을 만들자. 그리고 전시한 편지를 묶어서 책으로 내는 거야. 전국 고등학교에 몽땅 돌리고 교지마다 광고를 실으면 잘 팔리지 않을까?”

“무슨 대회 같은 게 있을걸? 고등학생들 문집 만들고 그런 거 경연대회 말야. 거기에 나가 상 받으면 매스컴도 탈 테고.”

“야아, 잘 하면 다음 전시회 때는 외국에 사는 펜팔친구들 초대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조국과 승주는 황당한 일을 궁리할 때에만 죽이 맞았다.

“분명 개망신에다가 퇴학이다.”

내 말에 둘 다 가재눈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승주가 빈정댔다.

“그렇겠지. 잘난 체하는 놈들이 꼭 혼자 새나가서는 명찰이나 뜯기고 다니더라. 너 그때 빵집에는 왜 안 갔냐? 꿈자리 사납다고 소희한테 전해줄까?”

얄팍한 자식. 나는 서클룸을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시회는 성사되기 어려웠다. 미지수가 세 개인 이차방정식처럼 숫제 문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문제였다. 하지만 상황이 어렵다고 혼자 발뺌을 하기에는 나는 귀찮게도 의리가 좀 있는 편이었다. 결코 승주 말에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나는 탄식하듯 낮게 읊조렸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그러고 나니 세속을 한꺼번에 등진 기분이 들어서 발을 멈추고 한참동안 석양을 바라보았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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