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스탠더드라이프]美대학풍토, 情보다 원칙 중시

  • 입력 1998년 10월 15일 19시 43분


95년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박사학위과정을 밟을 때 경험이다. 지도교수와 학생들이 공동저작을 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일을 겪게됐다. 한국에서는 공동저작으로 논문집을 낼 경우 흔히 교수가 첫번째 논문을 쓰는 것이 관례다. 스승에 대한 예우의 뜻도 담겨있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학생이 첫째 편을 쓰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교수가 학생들을 단순히 제자가 아니라 연구동료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즉 누가 연구활동에 많이 참여했고 누구의 아이디어로 연구가 시작되었느냐에 따라 저작 순서가 정해지는 것이다. 중요한 논문은 그 주제를 가장 많이 연구한 사람이 맡는다. 일반인들에게는 사소한 문제일지 모르지만 학자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여서 새삼 두나라 학계의 풍토차이가 느껴졌다.

박사학위를 거의 마칠 때 쯤 나는 사정위원회의 한 멤버였다. 유학지망생들의 1차 서류를 심사하고 걸러 교수단에게 올리는 일을 맡았다. 당시 사정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한 교수가 던진 말 한마디에 나는 얼굴을 붉혀야 했다.

“한국에서 보내는 지도교수 추천서엔 신용을 주지 못하겠어요. 학생에 대해 나쁘게 쓴 걸 거의 보지 못했거든요.”

미국 대학에서 지도교수의 추천서는 매우 엄격하다. 직장에 취업하거나 교수로 남을 때 한 학생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중요한 자료인 만큼 정(情)보다는 데이터에 근거해 객관적으로 제시된다. A학생은 ‘인지도는 높지만 통계능력이 떨어진다’, B학생은 ‘영어로 말은 잘하는데 작문실력은 떨어진다’는 식으로 구체적이다.

한번은 같은 지도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한 미국 여학생이 밤늦게 전화를 걸어 나를 보자고 했다. 지도교수가 추천서를 나쁘게 쓸 것 같아 걱정이니 교수에게 잘 좀 얘기해달라는 것이었다.

며칠 뒤 교수와 개인적인 자리가 있어 그 얘기를 꺼냈다. 교수는 한 마디로 “그것은 곤란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지도교수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얘기였다.

딱딱 끊어버리는 태도에 다소 질리기도 했지만 원칙을 중시하는 그들의 학문 풍토에서 많은 것을 배운 것도 사실이다.

김영수<순천향대 국제문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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