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한운사/「정주영 소떼」와 남북교류

  • 입력 1998년 6월 12일 19시 47분


때가 왔는가. 무엇인가 징조가 이상하다.

소 5백마리를 끌고 북으로 간다는 정주영(鄭周永)옹의 아이디어는 멋있다. 아무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소들이 북의 논밭을 가는 것을 상상하면 참으로 미묘한 감회가 인다. 세계에 대고 과시할 만하다. 우리들의 역사를 엮어 나가는 것이라고. 리틀엔젤스가 평양에 가서 북한 어린이들과 껴안고 노래를 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비난할 구실을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들에게는 사상으로 따져야 할 심한 갈등이 없다. 북의 어린이들은 다소 훈련을 받았겠지만 같은 나이 또래와 껴안을 때 별반 저항이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어린이는 순진하다는 면에서 누구나 공통점이 있다. 리틀엔젤스의 방북은 남북이 한 핏줄임을 재확인했다는 점에서도 관심거리였다.

남북 유도가 세계대회에 단일팀으로 나가고 싶다고 한다. 그것도 또한 잘 생각한 일이다. 어찌 유도뿐이랴. 축구든 탁구든 뭐든지 좋다. 남북이 국제스포츠대회에 함께 나가 우리 핏줄기의 저력을 과시하는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라던가. 그것도 잘 해보면 아주 의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우리는 서로 바로 눈앞에 있으면서도 광복후 50여년을 철천지 원수처럼 살아왔다. 이제 서서히 풀 날이 왔다. 공산국가가 다 망해버렸는데 너희들만 버텨서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따질 시기도 지났다. 주민들이 굶주리는 북의 실상 자체가 북한의 실패를 웅변해주고 있다.

이제는 만나는 계절이다. 다소 어색하기는 하지만 서로 손을 잡고 서로의 눈을 보면 될 일이다. 동구권 공산국가들이 구소련으로부터 벗어나고 종주국 소비에트연합이 공중분해되는 사이, 그리고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이 묘한 변신을 하는 사이 북은 어떻게 할 작정인가 우리는 걱정해 왔다. 농업정책의 실패와 기상이변으로 흉작이 계속되어 많은 사람이 굶주림에 시달려왔지만 그러면서도 저와같이 버틴다. 김일성(金日成) 김정일(金正日)로 이어지면서 아직도 저와같이 살아있다는 것은 차라리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북은 남쪽에서 쳐들어갈까봐 겁을 내는 모양인데 쳐들어가지 않겠다고 표명한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오히려 독안에 든 쥐가 물을까봐 걱정하는 것이 남쪽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일련의 사태변화를 보면 그들도 ‘조국해방’이니 ‘민족통일’이니를 내세워 남침하려는 무력통일노선을 이제는 완전히 포기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 같다. 남쪽은 제쳐놓고 미국 사람들하고만 상대하려는 수작도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이제는 안 모양이다.

비료지원과 이산가족상봉문제를 논의했던 베이징회담이 결렬됐을 때 한국의 대다수 지식인들은 찜찜해 했다. 실기(失期)를 하면 북녘의 농사에 반감되는 도움밖에 안되는 것을 우려해서였다. 이제 때가 왔다. 저네들의 자존심을 심히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우리들의 동포애가 전달되기를 바란다. 정주영옹의 소떼 외에도 우리 정부의 대북 물자지원은 이미 있었다. 적십자사 및 민간단체들의 의약 구호품 전달도 있었다. 물건이 오가는 곳에 마음도 오가게 마련이다. 이 기회를 계기로 북한과의 물적 인적 교류의 물꼬가 트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운사<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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