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天安門과 베이징大

  • 입력 1998년 6월 3일 19시 43분


중국의 6·4 톈안(天安)문 사태 9주년을 맞아 한 영웅적 저항자와 베이징대(北京大·베이다)의 족적이 다시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당시 후야오방(胡耀邦)전당총서기의 추모집회에서 비롯된 사태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실용주의노선에 따라 개방정책을 시행하던 중국이 겪은 대홍역이었다. 그러나 급진적 민주항쟁은 국가폭력을 불렀고 보수화라는 역작용을 야기했다.

▼89년6월5일 톈안문광장 옆의 널찍한 6차로도로. 진압군 탱크가 진주하다가 멈추어 섰다. 한 청년이 선두 탱크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탱크가 우측으로 움직이자 젊은이는 따라가 막아섰고 탱크가 좌측으로 가려 하자 그는 다시 그쪽으로 이동해 길을 터주지 않았다. 하얀 남방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한손엔 쇼핑백을 든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는 탱크위에 올라가 군인들에게 무어라고 소리쳤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4월초 이 청년을 ‘금세기 혁명가 20인’ 중 한명으로 선정하면서 탱크병사에 대한 그의 질책을 이렇게 가상했다. “여기 왜 왔소. 당신들 때문에 이 도시가 엉망이잖아.” 전날 군인들은 톈안문광장에서 단식농성하던 3천여명의 학생 노동자들과 1백여만명의 시위대에 발포했다. 그런 진압군에 맨손저항은 ‘금세기의 용기’로 기록됐다.

▼톈안문사태는 1919년 5·4운동, 1949년 중공정권수립 등과 함께 베이다가 핵심역을 한 사건이다. 5·4운동 지도자 차이위안페이(蔡元培)는 이 대학 총장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도서관사서로, 초기공산주의 전파자 천두슈(陳獨秀)는 교수로 베이다에서 일했다. 그러나 현재 당정치국 상임위원 7명 중 이 대학 출신은 한명도 없다. 지나친 이상주의와 급진주의의 쇠락을 보는 것같다.

김재홍〈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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