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김충식/비화가 많은 세상

  • 입력 1998년 2월 19일 20시 05분


박정희 시대의 비화들은 그가 세상을 뜬 뒤에 나오기 시작했다. 전두환정권이 들어서고 ‘5공’을 다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숱한 3공 비화들이 씌어졌다. 어두운 권력의 밀실, 구중심처에서 벌어진 역겨운 스토리들이 비로소 햇살 아래 드러났던 것이다. 전두환 시대의 비화들은 역시 5공이 저물고 그가 백담사에 갇히면서 공개되기 시작했다. 노태우정권이 5공과는 다르다는 전략을 구사하면서 비화의 봇물이 터졌다. 노정권 역시 김영삼정부가 들어서서야 가면이 벗겨졌다. 감추고 숨긴 얘기에다 돈보따리까지 쏟아졌다. 김영삼정부의 비화는 집권말기인 요즘 씌어지고 있다. 아들 얘기에서부터 외환대란을 불러온 시말까지가 보도되고 있다. 그만큼은 역사가 ‘진전’을 보인 것이라고 해야 할까. 권력자가 사망하거나 힘이 소멸된 이후에야 나오던 비화들이 벌써 보도되고 있으니까. 나중에야 비화를 쓴다는 것은 우선 알리고 보도하는 사람들이 제때에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증빙이다. 나를 포함한 기자들이 권력의 서슬에 눌리거나 눈치보다 주춤거린 대목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사실을 가리는 데 주력해온 권력의 책임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은 폭력과 위협으로 그들의 어두운 밀실에서 벌어지는 구린 일들을 감추어 왔다. 그들의 편의와 사소한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묻어버리려 몸부림쳐 왔다. 이제 ‘김대중납치사건’이라는 건국이래 손꼽히는 미스터리가 밝혀지고 있다. 김대중씨의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그 전모가 중앙정보부의 자료에 의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양파 껍질처럼 벗겨도 벗겨도 끝없이 이어지는 비화, 범죄적인 드라마. 정치에 비화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법치보다 ‘인치’(人治)로 흘러왔다는 뜻이다. 권력이 법과 제도의 틀안에서, 그리고 당당하게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지 못했다는 얘기이며, 최고권력자를 비롯한 소수의 이해관계에 따라 권력행사가 왜곡돼 왔다는 증거다. 이성보다 감성이, 공(公)보다 사(私)가, 노출보다 은폐가 지배하는 정치가 바로 범죄적인 비화를 낳는 것이다. 권력이 감시받아야 한다는 것은 정치학 원론에 나온다.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한다. 본시 이기적이고 감정적이며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견제와 감시가 없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되면 오류에 빠지고 더러 범죄에 흐르기도 하는 것이다. 김대중납치사건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유신정권이라고 하는, 사법부도 입법부도 언론도 감시불능인 슈퍼파워, 그 정권의 첨병이요 ‘주먹’으로서의 중앙정보부가 동원된 범죄인 것이다. ‘비화’는 대체로 권력의 불법성을 담는다. 국가기관을 동원해 납치극을 벌이고, 자리를 이용해 돈과 이권을 챙기며, 권력자로서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짓을 할 때 비화로 남는다. 그리고 비화의 주역 당사자들에게 회한이 된다. 이후락 당시 정보부장도 이제는 희대의 국가적 망신을 주도한 자신이 미울 것이다. 5공 6공때 밀실에서 돈보따리를 거두어들인 전직 대통령들도 후회막급일 터이다. 그토록 추스르고 파묻어도 결국은 드러나고 마는 비화의 비(非)은폐성에 치를 떨 것이다. 이제 비화없는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 바람이 통하고 햇빛에 드러나는 정치, 당당하고 떳떳한 이성적인 권력운용, 그것을 제때에 보도하고 알리는 언론, 그것이 김대중정부 시대에는 실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권퇴임후의 안전보장책이요, 길게 보아 국익을 지키고 법치로 나아가는 길이다. 김충식<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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