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천 서울랜드]서바이벌게임장

  • 입력 1998년 1월 22일 19시 46분


“핑, 핑, 투둑.” “여보 먼저 가, 내가 엄호할게….” 김영민씨(34·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황급한 목소리가 플라스틱 마스크 밖으로 새나온다. 한겨울 된바람에도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총탄을 피하느라 목줄기에 땀방울이 송알송알. 아내 조명희씨(31·보험회사 직원)가 투명 플라스틱 고글을 통해 걱정스런 눈짓을 보내고는 통나무 장벽 밖으로 뛰어나간다. “아얏!” 조씨의 흰색 헬멧에 8m 전방에서 저격병이 쏜 젤라틴 탄환이 명중. ‘팟’하고 선홍색 물감이 터져오른다. 격분한 김씨. “에잇, 투둑.” 적을 향해 압축가스총을 난사한다. 지난 일요일 오후 과천 서울랜드 놀이시설인 ‘아파치요새’. 국내 유일의 야외 상설 서바이벌게임장이다. 폐타이어 널빤지 위장포 등으로 만든 장애물이 4백여평의 공간에 빼곡하다. 게임에 앞서 김씨와 조씨는 ‘개구리복’으로 갈아입고 ‘숙달된 교관’으로부터 총기사용법과 주의사항을 들은 뒤 ‘전선’에 투입됐다. 겨울철이라 찾는 사람이 줄어든 탓에 두 팀으로 나뉘어 전투를 벌이는 프로그램 대신 초소를 지키는 적병을 상대로 게임을 벌였다. 젤라틴 탄환이지만 시속 1백80㎞로 날아와 헬멧이나 고글에 적중할 때마다 아찔한 충격이 전해졌다. 저격수의 총탄을 피하기 위해 잔뜩 웅크리고 뛰어다니다 보니 15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고마웠어, 당신….” 조씨가 마스크를 벗으며 한마디. 불과 2시간 전 상도동 집을 떠날 때의 찌무룩하던 표정은 간데없고 ‘전우애’마저 느껴졌다. 집에서 나올 때는 최소한 ‘동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게임장에서 총을 쏘는 ‘적의 적’은 동지임을 실감했다. “고맙긴.” 옆에 있던 교관이 눈웃음을 치며 한수 거든다. “두분은 다행이네요. 사이좋게 왔다가 진짜 싸움하고 나가는 부부도 많아요.” 운영하던 모피의류 하청업체 사정이 어려워진 뒤 듣기 힘들던 아내의 따뜻한 목소리. 지난 가을까지는 한달에 한두번 스트레스도 풀 겸 아내와 서바이벌게임장을 찾았었다. 문득 공장 걱정. 이내 떨쳐버렸다. ‘오랜만의 나들인데….’ 오후4시. 서울랜드 정문을 나와 완만한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걸었을까. 숨이 가빠올 때쯤 국립현대미술관의 장중한 외양이 눈에 들어왔다. 병풍처럼 펼쳐진 청계산과 관악산을 등지고 야외전시장을 둘러보던 조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영하의 기온에도 목이 훤한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야외촬영에 몰두하는 신부의 환한 미소. “행복할거야.” “그럼….” 미술관 정문 앞 지구 모양의 큰 공을 사방에서 힘겹게 밀고 있는 네 사람의 조각. ‘각축(角逐)의 인생’이라는 작품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어린 아이 손을 잡은 젊은 부부를 보니 맞벌이하느라 망원동 처갓집에 맡겨둔 딸 윤제(3)의 얼굴이 떠올랐다. ‘추위에 쫓겨’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둘을 반겼다. 수백개의 브라운관이 뿜어내는 다채롭고 희한한 영상들. 전망좋은 2층 휴게실에서 커피로 몸을 녹인 뒤 9개 전시홀을 둘러보고 나니 5시. 코끼리열차를 타고 전철역까지 나왔다. “저녁 먹고 들어가지.” “집에 가면 따뜻한 밥 있는데, 뭘….” 네정거장째인 사당역에서 내려 2번출구로 올라갔다. 30여개의 고만고만한 포장마차가 디귿자 모양으로 둘러선 방배동포장마차촌. ‘달빛 소나타’란 집을 골라 자리를 잡고 따끈한 우동 두그릇을 시켰다. 소주 한병과 조씨가 좋아하는 한치회 한접시도. “걱정 많지, 미안해. 하지만 염려말라구. 난 ‘살아남을’ 자신 있어.” 김을 푼 우동국물을 한수저 뜨던 김씨가 불쑥 말문을 열었다. 옆자리의 학생들을 둘러보며 한박자 딴전을 부리던 조씨. “걱정은 무슨 걱정, 위험하면 내가 ‘엄호’해주지 뭐.” 〈박중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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