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홍의 세상읽기]자랑스런 「낭만」

  • 입력 1997년 6월 24일 08시 10분


『혹시 병원 차릴 계획 없어?』 고등학교 동창인 박실장은 제법 큰 기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글쎄, 갑자기 무슨 소리야』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은 받는 질문이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의외였다. 박실장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때 몇번 만난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는 열흘 전쯤 동창들 몇이 모인 자리에서 20년만에 얼굴을 보았었다. 그런 자리가 으레 그렇듯이 저녁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명함을 주고받았는데 오늘 전화가 온 것이다. 별 생각 없이 약속 장소로 나갔고 분위기는 열흘 전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잠깐 뜸을 두더니 그런 질문을 던져온 것이었다. 『네가 병원 차린다면 거기에 투자를 할까 해서』 『대학에 멀쩡하게 잘 있는 사람에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벌써 그렇게 많이 벌어 놓았어?』 또 실없는 소리했구나 생각하면서도 어디에 투자할 만큼 재산이 있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그게 아니구,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까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듣기로는 너 잘 나가고 있다던데』 명예퇴직 바람도 한풀 지난 터에 웬 뒷북치는 소리인지. 그래도 무엇인가 심각한 것 같았다. 『그래, 나도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래 직원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야.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도 이제는 지쳤거든』 무엇인가 생존의 문제가 아닌 가치관의 문제로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어?』 『그건 아냐. 몇년전부터 느끼던 것인데 내가 잘난 게 하나도 없더라구』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 때부터 박실장의 한탄이 시작되었다. 자기 부서의 오과장은 영어 회화를 잘하고 정대리는 컴퓨터를 잘한다. 그런데 나는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그들에게 내세울 것도 없다. 그러니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이냐. 무능하다고 생각할 리야 없겠지만 존경하는 마음은 없을 것 아니냐. 어쩌면 우리 세대는 다 나같은 처지일지도 모른다. 요약하자면 그런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그들이 존경스러워?』 『무슨 소리야? 그 메마른 친구들에게 존경은 무슨』 『바로 그거야. 우리는 메마르지 않은 낭만이 있던 세대라는 말이지. 물론 업무적으로도 그들에게 좋은 상사로 보일 점이 많이 있겠지만』 『낭만하고 존경이 무슨 상관이 있어?』 『이 사람아, 존경이라는 것은 감성적인 것이야. 어떤 지식이나 기능의 문제가 아니라구. 요즘 감성지수라는 것도 유행이더구먼. 조금만 더 있어봐. 우리 세대의 낭만이 세상을 이끌고 갈 테니. 더구나 너는 아직도 꿈이 있는 것 같은데』 박실장을 향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이었다. 황인홍〈한림대교수·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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