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41)

  • 입력 1996년 12월 12일 19시 57분


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 〈15〉 애리가 내 곁으로 다가온다. 『언니, 자는 거야?』 『아니』 내 목소리는 꽉 잠겨 나온다. 『저녁 차리려고 하는데』 『먼저 나가, 써야 할 게 좀 있어』 애리를 내보낸 뒤 나는 서랍을 열고 깨끗한 종이를 꺼낸다. 얼마 후에 거실로 나와보니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로 스며든다. 싱크대 위의 쟁반에 굴과 새우가 튀김옷을 입고 겹쳐 누운 게 보인다. 저녁을 먹으면서 애리는 다시 현석의 얘기를 꺼내려고 내 얼굴을 흘낏거린다. 『언니, 어제는 누구 만났어?』 『친구』 『여자친구? 근데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들어왔어?』 『넌 이제 내 관상까지 보는구나』 어제 내가 만난 사람은 경애였다. 경애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나는 당연히 종태의 아내에게 무슨 말인가를 들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애의 용건은 나와 종태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경애는 이혼 수속중이라고 말했다. 이혼한다는 말은 경애가 아니라 윤선이 취했을 때마다 하는 소리였다. 신차장 사건이 있은 후로 우리가 만난 것은 서너번밖에 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인지 경애가 바빠졌고 윤선도 신차장 일을 행여 남편이 알게 될까봐 그러는지 점수를 따느라 집을 지키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단 만났다 하면 취하도록 마셨다. 취할수록 윤선은 새장 속의 새가 잠깐 맛보았던 외기에 대한 미련 때문에 불행해했다. 진희야, 너 정말 그 사람 소식 몰라? 그러지 말고 지금 전화 한번 해봐, 응? 너 내가 자존심도 없다고 속으로 욕하고 있지? 나쁜 년, 다 저 때문에 생긴 일인데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하고. 그러고는 긴 한숨을 내쉰 뒤, 그 말이 맞아. 여자는 추억으로 사는 거야, 라고 중얼거린 다음 쓸쓸하게 술잔을 쳐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전화를 하면 윤선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안녕했다. 집에 난방이 너무 세게 들어와서 새로 들여놓은 수입 벽난로가 거추장스럽게 되었다는 둥 부부동반 송년 모임에 입고 갈 모피옷을 사고 보니 그 안에 입을 정장이 마땅찮다는 둥 하면서. 이혼할 사람이 부부동반 모임 걱정은 왜 해? 라고 물으면, 이혼은 아무나 하니? 그것도 다 능력이 있어야지, 라며 한숨을 쉬는 게 고작이었다. <글 :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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