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 이호준은 로또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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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하다 결정적일때 터지는 한방, FA 직전 성적 치솟아 ‘로또준’ 별명
그러나 프로에서 20년 넘게 버틴건 남모르는 지독한 노력 있었기 때문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소설가가 된 건 상당 부분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문예지 신인상을 탄 행운을 ‘무료입장권’에 비유했다. 소설을 쓸 자격을 얻었지만 신인상의 행운이 가져다준 건 딱 거기까지였을 뿐, 이후 생겨날 장애물을 어떻게 넘을지는 오로지 자신에게 달렸다는 얘기다.

23년차 프로야구 선수 이호준(NC·40·사진)의 인생은 ‘행운’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1994년 해태에 고졸 신인으로 입단한 이호준은 김응용 당시 해태 감독의 눈에는 투수 재목이었다. 하지만 그는 투수에 흥미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계약금 많이 받고 사람들이 알아보니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어요. 균형을 잡아주려는 선배님도 많았지만 그땐 하나도 안 들렸죠.”

1996년 원하던 타자로 보직을 바꾼 그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야구장보다는 술집에서 인기 있는 선수였다. “나보다 어린 후배가 밥 사고 술 사는데, 난 지갑에 만 원짜리 하나만 있었어요. 동기들 만나도 자존심만 상하고…. 그러다 운 좋게 경기에 나가며 차츰 팬들의 환호를 받는 기쁨에 젖었어요. ‘잘 놀고 여자들한테 인기 많은 게 멋진 게 아니라 야구 잘하는 게 진짜 멋있는 거구나’라고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프로야구 인생 첫 번째 기회를 걷어찼던 ‘투수 이호준’은 1년도 안 돼 프로무대에서 사라졌지만 두 번째 기회를 절박하게 부여잡은 ‘타자 이호준’은 20년 넘게 살아남았다. 이미 두 차례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이호준은 올 시즌에도 팀 내 최고 대우(연봉 7억5000만 원)를 받았다. ‘놀아본 형’은 능글맞게 “요새 어디 술집이 좋냐? 형이 한잔 사줄게”라며 어린 선수들을 다독일 줄도 안다.

결정적일 때 터뜨리는 홈런 한 방과 FA 계약 직전에 치솟는 성적으로 그에게는 ‘로또준’이란 별명이 붙었다. 이런 모습이 그냥 찾아온 것은 아니다. 이호준의 노림수는 ‘무조건 직구’ 식의 막무가내가 아니다. 그는 타석에 서기 전 ‘상대 투수의 주무기, 오늘 잘 던지는 공, 이 점수차에서 투수가 나와 승부를 할지, 병살을 노린다면 어떤 코스로 유인할지, 앞선 경기에서 내가 잘 쳤던 코스로 분석돼 상대 투수가 주지 않을 만한 공은 뭔지’를 치밀히 계산한다. 그는 “주전이 되려고 피땀 흘리는 후배들을 보면 ‘오늘 못 치면 내일 치면 되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을 반성하게 된다”며 “타석에 설 때마다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35년째 소설을 쓰는 하루키는 ‘20∼30년 전 등단한 신인 작가 중 현역으로 활동하는 작가는 극소수’라고 했다. 걸출한 작품 한두 개를 쓰긴 쉽지만 계속해서 작품을 쓰려면 행운에 더해 자질과 지독한 노력이 필수다. 프로라는 링 안에서 이호준이 20년 넘게 버틸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
#무라카미 하루키#이호준#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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