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체전 알파인스키 시각장애부문 첫 출전 양재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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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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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 탈수록 나빠지는 눈… 그러나 멈출 수 없다… 캄캄한 삶에 스키만이 빛…

양재림이 16일 정선 하이원리조트에서 열린 전국장애인겨울체육대회 알파인 스키 여자부 시각장애부문 슈퍼대회전에서 안정된 자세로 설원을 내려오고 있다.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양재림이 16일 정선 하이원리조트에서 열린 전국장애인겨울체육대회 알파인 스키 여자부 시각장애부문 슈퍼대회전에서 안정된 자세로 설원을 내려오고 있다.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나, 언니보다 잘하죠?” 엄마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애써 눈물을 참고 “그래, 네가 더 잘해”라고 대답했다. 당시 여덟 살이던 둘째 딸의 물음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양재림 씨(22)는 7개월 만에 태어났다. 엄마 품 대신 인큐베이터에 갇힌 1.3kg의 작은 아이는 며칠 뒤 무호흡증으로 산소마스크를 써야 했다. 허약한 아이의 여린 눈은 과다한 산소 투입을 견디지 못했다. 미숙아 망막증으로 왼쪽 눈은 시력을 잃었고 오른쪽 눈은 바로 눈앞의 사물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 재림 씨가 장애 없이 태어나고 자란 한 살 위 언니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양재림 씨(오른쪽)에게 소리와 몸짓으로 방향을 알려주는 가이드 정고운 씨. 정고운 씨 제공
양재림 씨(오른쪽)에게 소리와 몸짓으로 방향을 알려주는 가이드 정고운 씨. 정고운 씨 제공
엄마 최미영 씨는 딸들과 함께 스키장을 찾았다. 재림 씨가 여섯 살 때였다. 모든 면에서 남보다 못한 재림 씨가 잘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주고 싶었다. 엄마는 시각장애 딸을 가르치기 위해 미리 스키를 배워뒀다.

시작할 때만 해도 언니를 따라가지 못했던 재림 씨는 조금씩 재미를 붙여 갔다. 2년쯤 지났을 때 재림 씨가 물었다. “나, 언니보다 잘하죠?” 간절히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재림 씨가 소원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시각장애인 특수학교를 졸업한 재림 씨는 부모의 만류에도 일반 고교에 진학했다. 원하는 대학에 가고 싶어서였다. 힘든 학교생활이 시작됐다. 필기를 할 수 없어 친구 노트를 보며 공부를 했지만 학년이 높아지면서 급우들은 노트 빌려주기를 꺼렸다. 재림 씨는 이를 악물었다.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터라 미술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물을 눈앞에 가까이 대고 본 뒤 기억을 더듬어가며 붓을 움직였다. 먼저 미대에 진학한 언니가 동생을 도왔다. 재림 씨는 특별전형을 통해 이화여대 조형예술학부 동양화과에 합격했다.

엄마는 지난해 말 장애인스키협회를 찾았다. 여유를 찾은 재림 씨가 스키를 더 배우고 싶어 해 코치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협회 정인섭 전무는 최 씨에게 “개인 취미를 위해 코치를 붙여줄 수는 없지만 선수로 뛴다면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다.

정 전무는 재림 씨를 병원으로 데려가 메디컬 테스트를 받게 했다. 근력, 지구력 등이 나무랄 데 없었다. 스키를 타게 했다. 폼이 좀 엉성했지만 며칠 만에 바로 잡혔다. 정 전무는 “선수 경험은 없지만 지금 실력으로도 세계무대에서 통할 수준”이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은 가이드와 함께 스키를 탄다. 가이드는 선수 앞에서 소리와 몸짓으로 방향을 알려 준다. 정 전무는 딸 고운이를 재림 씨의 파트너로 소개해 줬다. 스키 명문 고성고 3학년인 고운 씨는 알파인스키 여고부 랭킹 1, 2위를 다투는 엘리트 선수다.

둘은 1월부터 호흡을 맞췄다. 스타일이 잘 맞았다. 재림 씨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정 전무는 “2014년 소치 겨울장애인올림픽에서 국내 스키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노려볼 만하다”고 말했다. 고운이는 “아버지의 권유로 가이드를 시작했지만 언니를 보면서 나도 올림픽 메달이라는 목표를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재림 씨의 오른쪽 눈은 더 나빠지고 있다.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주위에서는 스키를 자주 타 자외선에 많이 노출된 탓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했다. 지난 달 중순 엄마는 딸을 앉혀 놓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취미라면 몰라도 선수로 뛰려면 힘들 거야. 지금보다 스키를 훨씬 많이 타야 하는데 남은 한쪽 눈마저 실명할 수 있어. 그래도 스키 선수 할래?”

엄마는 눈물을 쏟았지만 딸은 울지 않았다. 입술을 꼭 깨문 채 이렇게 말했다.

“나도 알아 엄마. 내 눈이 언젠가는 안 보일 수도 있다는 걸. 그러니 볼 수 있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어요.”

재림 씨는 16일 하이원리조트에서 열린 전국장애인겨울체육대회 알파인스키 여자부 시각장애부문 슈퍼대회전에 출전했다. 출전자가 혼자라서 시범경기로 열렸고, 고운이가 전국겨울체육대회에 지역 대표로 출전했기에 임시 가이드와 호흡을 맞췄지만 재림 씨는 최선을 다했다. 정 전무는 “기록을 확인하고 놀랐다. 이번 대회 여자부 모든 장애등급을 통틀어 가장 좋다. 남자부와 비교해도 상위권에 속한다. 가능성을 입증했다”고 말했다. ‘스키 선수 양재림’의 화려한 데뷔 무대였다.

정선=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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