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장승은 월드컵 보고싶다"…종교계 반발의식 제지당해

  • 입력 2002년 5월 17일 18시 51분


월드컵대회 개최를 기념해 사재 수천만원을 들여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입구에 대형 장승을 세우려는 한 예술인의 소망이 종교계의 반발을 의식한 서울시의 거부로 무산될 위기를 맞았다.

충남 예산군 삽교읍에서 공방 ‘장승마당’을 운영하는 방유석(方宥錫·42)씨는 특유의 재치로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온 장승 조각가.

그는 최근 충남 태안군 안면도 꽃박람회장에 장승 51점과 솟대 202개를 선보였다.

“장승이 꼭 무섭고 험상궂은 얼굴이어야 하느냐”는 게 그의 작품관이다. 그는 충남 청양군 칠갑산 장곡사 장승공원에 세운 사내대장군에는 다리를 세 개 붙이기도 하고 대구 문화예술회관에 세운 장승에는 ‘이 뭐꼬?’라는 불가(佛家)의 화두를 새기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9월 서울도시철도공사 성산역무관리소가 ‘월드컵경기장 북문으로 연결되는 지하철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 바깥 계단에 장승을 세우고 싶다’는 글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것을 본 뒤 ‘월드컵 장승’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어 성산역무관리소측과 장승 제작 및 설치에 대한 합의를 마쳤다.

그는 뉴질랜드산 아름드리 소나무를 구해 망치와 정으로 3개월을 다듬어 천(天) 지(地) 인(人)을 뜻하는 키 6m, 직경 1.1m의 천하대장군과 키 4m, 직경 1.8m의 장승 두상(頭像) 2점 등 장승 3점을 완성했다. 이들 장승은 무게가 각각 6t이나 된다.

천하대장군은 월드컵을 상징해 축구공을 입에 물렸고, 두상의 입은 어른 3명이 들어가 기념 촬영을 할 수 있을 만큼 크게 만들었다.

당초 월드컵경기장에 장승을 세우기로 한 것은 지난달 26일. 그러나 뒤늦게 이 같은 계획을 알게 된 서울시가 지난달 25일 “일부 종교인들이 우상이라고 반발할 것이 우려되니 재검토하는 것이 좋겠다”고 도시철도공사에 요구했다.

이에 도시철도공사 고위 간부들도 “여러 곳에 자문을 받아보라”고 지시해 이들 장승은 완성된 뒤 20일이 넘도록 방씨의 작업장에 놓여 있는 신세가 됐다. 역시 자비를 들여 17일 오전 대전 월드컵경기장 앞에 대형 장승 한 쌍을 설치한 방씨는 “수천년간 이 땅을 지켜온 장승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라며 “장승을 우상으로 섬겨 절하는 사람을 봤느냐”고 반문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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