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두 잔이라 괜찮다”던 여성, 빨대 불자 10초 만에 ‘운전 포기’

  • 동아일보

[2000명을 살리는 로드 히어로] 동아일보-채널A 2025 교통안전 캠페인
〈18〉 음주 자가 측정하는 벨기에
브뤼셀 식당가 ‘상시 음주측정기’… 화면에 “벌금 220만 원” 경고
“취기 없다” 자신하다가 ‘화들짝’… 대다수는 “차 두고 가겠다” 변화

지난달 18일 오전 벨기에 와브르 ‘플라인’ 본사에서 아들랭 자크 드 딕스뮈드 대표가 음주 자가 측정기를 사용하고 있다. 빨대를 꽂고 10초간 숨을 불어넣으면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해 운전 가능 여부를 알려주는 이 기기는 브뤼셀 곳곳에 설치돼 음주운전에 경각심을 주고 있다. 와브르=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지난달 18일 오전 벨기에 와브르 ‘플라인’ 본사에서 아들랭 자크 드 딕스뮈드 대표가 음주 자가 측정기를 사용하고 있다. 빨대를 꽂고 10초간 숨을 불어넣으면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해 운전 가능 여부를 알려주는 이 기기는 브뤼셀 곳곳에 설치돼 음주운전에 경각심을 주고 있다. 와브르=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맥주 딱 두 잔 마셨는데, 운전하면 큰일날 뻔했네요.”

지난달 20일 오후 9시(현지 시간) 벨기에 브뤼셀 시내의 한 식당. 식사를 마친 루이즈 씨(32)가 키오스크 형태의 ‘플라인박스(Fline Box)’에 빨대를 꽂고 약 10초 동안 숨을 불어넣자 곧바로 붉은 경고 문구가 떴다. ‘혈중 알코올 농도 높음. 운전 불가.’

이어 화면에는 “택시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안내와 함께 “운전 시 1260유로(약 220만 원) 이상의 벌금과 15일간의 면허정지 처분을 받을 수 있다”는 구체적인 경고가 뒤따랐다. 루이즈 씨는 “취기가 거의 없어 방심했는데, 자칫 운전대를 잡았다면 사고를 낼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식당 매니저 장피에르 씨(28)는 “올 초 키오스크 설치 이후 측정 결과를 보고는 ‘내가 이렇게 취한 줄 몰랐다’며 택시를 부르는 손님이 적지 않다”고 했다.

● 브뤼셀 밤거리 지키는 ‘음주측정기’

플라인박스는 브뤼셀 교통청이 지난해 1월부터 시내 곳곳에 설치한 ‘상시 음주측정기’다. 성인 키 높이 본체에 터치스크린과 일회용 빨대를 꽂아 숨을 불어넣는 음주측정 장치가 연결된 형태다. 유럽연합(EU) 경찰이 사용하는 장비와 동일한 기준으로 혈중 알코올 농도를 계산해 보여준다. 기준 초과 시 ‘언제쯤 운전이 안전한지’와 위반 시 벌금 액수까지 알려준다. 주로 식당과 술집, 축제장, 대형 콘서트장 등 음주가 잦은 곳에 설치돼 있다.

브뤼셀 교통청이 이런 프로젝트에 나선 이유는 심각한 도시 내 음주운전 문제 때문이다. 브뤼셀 교통청에 따르면 지난해 교통사고의 8%가 음주운전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자벨 얀선스 브뤼셀 교통청 교통안전팀장은 “식사에 맥주나 와인을 곁들이는 벨기에 문화 특성상 각종 축제가 이어지는 여름과 겨울에는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와 피해가 특히 심각하다”고 말했다.

효과는 수치로 증명됐다. 지난해 1월부터 올 11월까지 플라인박스 음주측정 데이터 약 6만5000건을 분석한 결과, 이용자의 80% 이상이 이미 술을 마신 상태였고, 이 가운데 54%는 ‘운전 불가’ 상태로 나타났다. 특히 19∼34세 청년층의 평균 혈중 알코올 농도는 면허정지(0.03%) 수준이 넘는 0.034%로 집계됐다.

고무적인 것은 ‘행동 변화’다. 운전 불가를 판정받은 이용자 중 59%는 실제로 운전을 포기하고 도보나 대중교통, 택시 등 다른 이동 수단을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얀선스 팀장은 “본인의 상태를 빠르고 직관적으로 보여 주고, 처벌 가능성을 함께 제시해 경각심을 준 결과”라고 설명했다.

● “단속은 연 2회, 예방은 365일”

지난달 18일 오전 와브르 지역의 플라인 본사 공장. 이곳에서는 벨기에 전역 크리스마스 축제 현장에 설치할 부스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다. 아들랭 자크 드 딕스뮈드 플라인 대표는 “술을 마시면 인지 능력이 떨어져 본인의 운전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어린 시절 친할머니를 음주운전 사고로 잃었다. 대학에 진학한 뒤 술을 마시고 운전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친구들을 보면서 ‘이 문화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창업했다. 그는 “음주 상태에서 운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쉽게 체감하게 만드는 기기를 고안했다”고 설명했다.

벨기에의 음주운전 단속은 보통 연 2차례 집중단속 기간에 맞춰 이뤄진다. 하지만 자크 대표는 “단속이 없는 날에도 사람들은 술을 마신다”며 “단속 중심의 ‘사후 대처’만으로는 음주운전을 근절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1년 내내 눈앞에 보이는 습관 교정 장치’를 만들고 싶었다”며 “술을 마시는 공간마다 이런 장치가 비치되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술 마신 뒤 운전은 안 된다’는 습관을 다시 깊이 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나는 괜찮다” 착각이 부르는 참사

음주운전자는 자기가 마신 술의 양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짙다. 아일랜드 도로안전청(RSA)과 플라인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올해 플라인박스에서 ‘운전 불가’ 판정을 받은 5447명 중 4169명(76.5%)은 측정 직전 ‘나는 운전이 가능한 상태’라고 평가했다. 절반 이상인 3480명(63.9%)은 ‘측정 결과를 보기 전까지는 곧 운전할 예정이었다’고 답했다. 크리스티 헤거티 RSA 도로안전교육팀장은 “많은 사람이 실제로는 기준치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운전해도 되는 상태’라고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특히 18∼34세 남성이 자신의 혈중 알코올 농도를 가장 과소평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다. 3월 한국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음주운전으로 교통안전 교육을 수강한 1518명 중 309명(20.4%)은 ‘술이 깼을 것으로 판단해서’ 음주운전을 했다고 밝혔다. ‘술을 몇 잔 안 마셔서’ 운전대를 잡았다고 답한 이도 184명(12.1%)에 달했다. ‘주관적 판단’이 음주운전의 주원인인 셈이다.

10월에는 친구들과 소주 10병을 나눠 마신 뒤 시속 118km로 차를 몰다가 고등학생을 치어 숨지게 한 30대 남성이 징역 6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사고 당시 혈중 알코올 농도가 면허 취소 기준(0.08%)을 크게 웃도는 0.155%였던 그는 재판에서 “술은 마신 것은 인정하지만 당시 운전이 가능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가수 김호중 씨 또한 음주운전 뺑소니 재판 과정에서 “정상 운전이 불가능할 정도의 만취 상태는 아니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편 바 있다.

얀선스 팀장은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적극적으로 인지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예방 수단”이라며 “플라인박스는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 동시에, 다른 이동 수단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브뤼셀 교통청은 연내 기기를 추가로 확대 보급할 방침이다.

술 취하면 킥보드 시동 안 걸려… 음주운전 고삐 죄는 벨기에


GPS로 유흥가 심야 운전 막고
앱 내 테스트 통과해야 대여

음주운전의 그늘은 승용차에만 머물지 않는다. 최근 전동 킥보드 등 개인형 이동장치(PM) 이용자가 급증하면서 ‘킥보드 음주운전’이 도로 위 새로운 뇌관으로 떠올랐다. 벨기에 브뤼셀 교통청에 따르면 2021년부터 3년간 브뤼셀 내 음주로 인한 모든 사고 중 8.4%가 전동 킥보드 음주운전이었다. 자동차 음주운전(4.3%)의 두 배에 육박한다. 이자벨 얀선스 교통청 교통안전팀장은 “차량뿐만 아니라 PM 음주운전 역시 빈번하게 발생하며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벨기에는 차량뿐만 아니라 전동 킥보드 음주운전을 막기 위해 민관 협력에 나섰다. 2022년 도로교통법을 개정해 전동 킥보드 이용자에게도 자동차 운전자와 동일한 혈중 알코올 농도 기준을 적용하고, 전동 킥보드를 일반적인 음주운전 단속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전까지는 경찰의 단속에서 전동 킥보드가 사각지대로 남아 있어, 음주·약물운전 실태가 과소 파악된다는 지적이 있었다.

물리적 차단책도 논의 중이다. 브뤼셀시는 각 자치구와 협의해 유흥가와 주점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심야 시간대 공유 킥보드 운행을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활용해 술이나 마약에 취할 가능성이 높은 특정 시간·장소에서 기기 작동을 아예 막겠다는 취지다.

민간 기업은 ‘기술적 예방’에 나섰다. 유럽 최대 공유 킥보드 업체 ‘볼트(Bolt)’는 연말 연휴 기간 벨기에 주요 도시에서 ‘음주 테스트’를 대폭 강화한다. 앱상에서 인지 반응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킥보드 시동이 걸리는 기능인데, 평소 심야(오후 7시∼오전 5시)에 적용하던 것을 축제 기간에는 오후 5시부터 다음 날 오전 7시까지로 4시간 연장했다. 테스트에 실패하면 이용을 차단하고 택시 호출 등 대체 수단을 안내한다.

한국도 ‘남의 일’이 아니다. 서울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4년간 서울에서 적발된 PM 관련 법규 위반 15만5449건 중 음주운전은 4621건(3.0%)에 달했다. 경찰은 연말을 맞아 이륜차와 PM의 음주운전, 인도 주행 등 고위험 행위를 뿌리 뽑기 위해 서울 전역에서 불시 단속을 벌일 방침이다.

공동 기획: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경찰청 소방청 서울시 한국교통안전공단 손해보험협회 한국도로공사 한국도로교통공단 한국교통연구원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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