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140명이 두 개의 주민등록증으로 사는 이유 [그 마을엔 청년이 산다]

  • 동아닷컴
  • 입력 2025년 11월 16일 10시 00분


지방 소멸에 맞서는 청년들의 이야기-26회
대구 청년마을 ‘프로토타운’ 이만수 대표 · 김인혜 총괄PM

대구 북성로의 공구골목이 청년들이 함께하는 문화예술 거리로 거듭나고 있다. 사진=기술예술융합소 ‘모루’를 운영하는 청년들 (프로토타운 제공)
대구 북성로의 공구골목이 청년들이 함께하는 문화예술 거리로 거듭나고 있다. 사진=기술예술융합소 ‘모루’를 운영하는 청년들 (프로토타운 제공)

‘공구’라는 말은 원래 물건을 만들거나 고칠 때 쓰는 도구를 뜻한다. 그러나 MZ세대에게는 대체로 ‘공동구매’ 즉 “함께 구한다”는 의미로 더 익숙하다. 대구역 맞은편에는 오래된 철공소와 공업사, 공구상이 줄지어 늘어선 골목이 있다. 한강 이남 최대의 ‘공구거리’로 불리던 북성로다.

이 낡은 골목이 청년들이 함께 하는 문화예술 실험실로 거듭나고 있다. ‘기술’과 ‘예술’이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분야의 만남이 새로운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름하여 ‘프로토타운(ProtoTown)’이다. 최종 제품이나 서비스를 출시하기 전 아이디어를 검증하기 위해 미리 선보이는 시제품 ‘프로토타입’(Prototype)과 ‘타운’(Town)을 결합한 개념이다.

대구 프로토타운을 찾은 인근 지역 대학생들이 공구를 활용해 영상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대구 프로토타운을 찾은 인근 지역 대학생들이 공구를 활용해 영상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북성로에 가면 탱크도 만든다”

철공소와 공구상이 줄지어선 대구의 공구골목 북성로가 청년들의 문화예술 실험실로 거듭나고 있다.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철공소와 공구상이 줄지어선 대구의 공구골목 북성로가 청년들의 문화예술 실험실로 거듭나고 있다.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북성로는 한때 대구의 ‘심장부’였다. 경상감영이 있던 자리로, 일제강점기에 양복점, 목욕탕, 극장, 여관, 백화점 등이 들어서면서 활기를 띠었다. 광복 이후에는 인근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폐공구와 철물을 다루는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공구골목이 됐다. 6∙25 전쟁 때는 피난온 문인과 예술가들이 터를 잡으며 공업과 문화, 유흥이 공존하는 독특한 지역이 형성됐다. 시인 구상·화가 이중섭 등 한국 근현대 예술의 거장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대구의 오랜 역사가 녹아있는 여관을 문화공간으로 꾸민 ‘대화장’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대구의 오랜 역사가 녹아있는 여관을 문화공간으로 꾸민 ‘대화장’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프로토타운을 이끄는 청년들은 북성로의 이런 DNA를 지금 세대의 방식으로 복원해 보고 싶었다. 실험의 중심에는 레인메이커, 더폴락, 훌라라는 세 청년기업이 있다. 이들은 행정안전부가 지원하는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에 도전했다.

계명대학교 선후배 사이인 이만수 프로토타운 대표(37∙레인메이커 대표)와 김인혜 총괄PM(폴락 대표)은 이 지역에서 10년 넘게 버텨온 청년들이다. 북성로의 역사와 건물, 사람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만수 프로토타운 대표(레인메이커 대표)와 김인혜 총괄PM(폴락 대표)이 프로토타운을 소개하고 있다.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이만수 프로토타운 대표(레인메이커 대표)와 김인혜 총괄PM(폴락 대표)이 프로토타운을 소개하고 있다.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대구에서는 북성로에 가면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있어요. 언뜻 기술과 예술은 전혀 다른 영역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예술가가 조형물을 만들 때 필요한 철판, 나사, 도료를 이 골목 몇 걸음 안에서 다 구할 수 있어요. 제작이 일상인 동네죠”(이만수 프로토타운 대표)

예술도 결국 무언가를 ‘만드는 일’

이만수 프로토타운 대표(레인메이커 대표)가 자신이 운영하는 기지 ‘대화장’을 소개하고 있다.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이만수 프로토타운 대표(레인메이커 대표)가 자신이 운영하는 기지 ‘대화장’을 소개하고 있다.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레인메이커는 사회적 이슈를 콘텐츠로 만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팅’ 회사다. 더폴락은 지역 콘텐츠를 출판하고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공간이다. 훌라는 공구로 예술을 만드는 기술·예술 융합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이 모여 올해 초 프로토타운을 꾸렸고, 지난 5월 행안부 청년마을 사업에 선정됐다. 현재 이들 3개 팀을 중심으로 총 12개의 창작팀이 협의체를 구성해 각자의 공간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김인혜 프로토타운 총괄PM(폴락 대표)이 자신이 운영하는 기지 ‘더폴락’을 소개하고 있다.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김인혜 프로토타운 총괄PM(폴락 대표)이 자신이 운영하는 기지 ‘더폴락’을 소개하고 있다.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책도 기술이고, 디자인도 기술이에요. 예술은 결국 ‘만드는 일’이잖아요. 북성로는 ‘만드는 힘’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공간이에요.” (김인혜 프로토타운 총괄PM)

여기서는 누구나 자기만의 프로토타입(시제품)을 만들 수 있다. 12개 창작팀은 각각의 공간을 ‘기지’처럼 운영하며, 참가자들을 이어주고 있다. 공예·디자인·영상·출판·문화기획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청년들이 직접 시제품을 만들고 전시하도록 돕는다. 방문객들은 ‘기지 투어’를 할 수 있다.

모루 마당에 각종 공구로 만든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모루 마당에 각종 공구로 만든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공구를 활용해 북성로를 표현한 전시 작품. 박태근 기자 ptk@donga.com
공구를 활용해 북성로를 표현한 전시 작품. 박태근 기자 ptk@donga.com
훌라가 운영하는 기지 ‘모루’에서는 인근 대학생들이 모여 공구거리에서 나온 물건으로 예술품을 만든다. 공업용 파이프는 악기로 변신하고 스페너는 공예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낮에는 공구상 사장님들이 눈썰미와 눈대중만으로 척척 고치고 만들어내는 장면들과 여기저기서 망치질하는 소리, 기름칠 잔뜩 묻은 작업복이 스칩니다. 처음엔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같았지만, 이곳을 걷고 사장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축제도 열며 이젠 우리의 고향이자 둥지가 됐습니다.” (안진나 훌라 대표)

망치 소리와 예술의 영감이 섞인이는 곳

프로토타운은 ‘청년주민등록’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실제 주소지와 무관하게 이곳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에게 ‘마을의 일원’임을 인정하는 신분증을 발급해준다. 신분증을 가진 청년에겐 각종 프로그램에서 우대 혜택이 주어진다. 올해 목표 인원 90명을 훌쩍 뛰어넘는 140명이 등록을 마쳤다.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프로토타운은 ‘청년주민등록’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실제 주소지와 무관하게 이곳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에게 ‘마을의 일원’임을 인정하는 신분증을 발급해준다. 신분증을 가진 청년에겐 각종 프로그램에서 우대 혜택이 주어진다. 올해 목표 인원 90명을 훌쩍 뛰어넘는 140명이 등록을 마쳤다. 대구=박태근 기자 ptk@donga.com

프로토타운은 ‘청년주민등록’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실제 주소지와 무관하게 이곳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에게 ‘마을의 일원’임을 인정하는 신분증을 발급해준다. 신분증을 가진 청년에겐 각종 프로그램에서 우대 혜택이 주어진다. 올해 목표 인원 90명을 훌쩍 뛰어넘는 140명이 등록을 마쳤다.

이달 1일부터는 ‘메이드 인 북성로’ 공모전을 진행하고 있다. 북성로의 다양한 유무형의 자원을 재해석한 창작물, 조형물, 생활제품, 관광기념품, 발명품, 디자인물 등을 공모한다. 청년 개인 기업 단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선정된 팀은 100만~500만 원의 제작비를 지원받는다.

프로토타운 본부에 청년들이 모여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다. 프로토타운 제공.
프로토타운 본부에 청년들이 모여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다. 프로토타운 제공.
공구상인회 김대식 회장이 프로토타운 청년들과 소통하며 노하우를 전하고 있다. 프로토타운 제공
공구상인회 김대식 회장이 프로토타운 청년들과 소통하며 노하우를 전하고 있다. 프로토타운 제공

공구상인회 김대식 회장은 “요즘 알리 테무와 같은 전자상거래가 활성화되며 공구거리는 경쟁력이 떨어지고 점점 슬럼화되고 있었다“며 “이 골목을 2~3세대 쭉 이어 가고 싶었지만, 청년들의 발길이 끊기며 이젠 한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이렇게 젊은 친구들이 와가지고 예술 활동을 하면서 골목에 생동감이 생기고 활성화되는 것 같아 보기좋다. 같이 상생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다른 상인들도 다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기대감을 전했다.

#청년마을#프로토타운#대구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오늘의 추천영상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