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to 6’ 틀을 깨야 노동시장 활력 되찾는다[주애진의 적자생존]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4월 19일 11시 00분


초고령사회가 시작됐습니다. 정부는 저출생, 고령화를 ‘극복’할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지금 필요한 건 ‘적응’과 ‘변화’ 아닐까요. ‘적자생존’은 달라진 인구구조에 적응해야 살아남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가 초고령화에 적응하기 위해 고민해야 할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일본 특수셔터 제작회사 ‘요코비키셔터’의  사무실.  동아일보DB
일본 특수셔터 제작회사 ‘요코비키셔터’의 사무실. 동아일보DB
한국보다 먼저 초고령사회를 맞은 일본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2023년 11월 일본 도쿄 아다치구의 특수셔터 제작회사 ‘요코비키셔터’를 방문했다. 이 회사는 당시 직원 34명 가운데 18명(52.9%)이 60세 이상이었다. 고령자를 많이 고용할 뿐만 아니라 이들에 대한 임금과 복지 수준이 뛰어나 고령자 고용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곳이다.

고령 직원을 배려하는 여러 제도 가운데 유연한 근무 방식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곳 직원들은 각자 사정에 따라 근무 일수와 시간이 다르다. 누군가는 매일 8시간씩 일하고, 누군가는 일주일에 사흘만 출근하는 식이다. 건강 등의 이유로 오래 일하기 어려운 사람을 배려한 것이다. 이 회사의 이치카와 신지로 대표는 “다양한 근무시간이나 자유로운 휴가 사용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는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초고령사회에서 유연한 근로시간 제도를 확산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주 5일, 하루 8시간’으로 고착된 근로시간이 다양해지면 더 많은 고령자와 여성이 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마침 6월 3일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도 주 4일제, 주 4.5일제 등의 공약을 검토하고 있다. 차기 정부는 무엇보다 근로시간 개편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지난 정부의 실패를 교훈 삼아 제도 개편에 성공하기 위해 살펴볼 점을 짚어봤다.

● 고령·여성 노동력으로 인구감소 보완
저출생과 고령화로 인구가 감소하면서 2045년 한국의 15~64세 생산연령인구는 2022년의 72.5% 수준인 2665만4000명(통계청 중위 추계)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저서 ‘일할 사람이 사라진다’에서 “한국은 여성과 장년 인구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비교적 낮은 편이라 이들이 더 많이 일하면 인구감소로 인한 노동력 감소를 완화할 수 있다”고 했다. 2022년 기준 일본의 35~49세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은 80% 안팎이지만 한국은 60%대로 10~20%포인트가량 낮다. 60~64세 남성의 경제활동참가율도 한국이 70%대 중반으로 일본보다 약 10%포인트 낮았다. 이 교수는 한국 여성과 장년층(50~64세)의 경제활동참가율을 일본만큼 높이기만 해도 2047년까지 한국의 노동력을 2022년의 90%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고령층과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늘리려면 이들이 선호하는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여성의 경우 출산과 육아로 일을 그만두는 30, 40대를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이는 게 중요하다. 고령층과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은 모두 근로시간이 짧고, 초과 근로와 주말 근무의 비중이 낮은 일자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2024년 5월)’에 따르면 일하기를 원하는 55~79세는 일자리 선택 기준으로 임금(20.2%)보다 ‘일의 양과 시간대’(30.5%)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시간제 일자리를 원한다는 응답(47.7%)도 전일제(52.3%) 희망자와 비슷하게 많았다.

유연근무제가 여성 고용에 긍정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지난해 정성미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국내 사업체(2019~2021년)를 분석한 연구에서 유연근무를 시행한 기업의 여성 취업자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4.7%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정 연구위원은 “출산율과 여성 고용률이 높은 유럽 국가에선 주 32시간 이하 근무, 출퇴근 시간 변경 등 다양한 유연근무를 활용하는 비율이 높다”고 했다.

● 근로시간 ‘줄이기’보다 ‘다양화’ 필요
경직적인 근로시간을 바꿔야 한다는 데는 다들 공감하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는 건 쉽지 않다. 윤석열 정부도 2023년 3월 근로시간제 개편안을 내놨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백기를 들었다. 당시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안의 핵심은 ‘주 52시간’으로 묶여 있는 근로시간의 관리 단위를 주(週)에서 최대 연(年)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주당 근로시간을 기본 40시간과 연장근로 최대 12시간으로 제한한다. 관리 단위를 늘리면 주 최대 69시간까지 일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2023년 3월 고용노동부의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 홍보자료. 출처 고용노동부 공식 블로그
일이 많을 때 몰아서 일하고, 한가할 때 길게 쉬자는 개편안의 취지는 좋았다. 다만 유연성의 초점이 연장근로 12시간에 맞춰진 게 문제였다. 노동계는 ‘주 69시간제’로 장시간 노동을 조장한다며 반발했다. 일반 시민들의 반응도 싸늘했다. 2023년 한국의 연간 근로시간은 1872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742시간보다 130시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연장근로를 더 유연하게, 더 많이 쓰도록 하겠다니 비판이 쏟아졌다.

새 정부에서 추진할 근로시간 제도 개편은 주당 기본 40시간을 더 유연하게 쓰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동 전문가들은 주당 근로시간을 획일적으로 단축하는 것보다 개별 상황에 맞게 다양하게 운영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국노동연구원과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이 지난해 9월 연 토론회에서 성재민 노동연구원 부원장은 “스웨덴, 덴마크, 프랑스 등은 장기간 휴가를 사용하고, 유연근무 등을 활용해 짧은 시간 일하는 사람이 많아서 연간 근로시간이 적게 나온다”고 말했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주 30시간 미만 일하는 근로자의 비중이 크고, 여름 휴가철 일시 휴직자가 취업자의 약 30%를 차지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휴가 때가 아닌 평소 일하는 시간은 스웨덴 주 40.2시간, 독일 주 37.2시간 등”으로 큰 차이가 없다며, “한국은 평소 짧게 일하는 사람이 적고 휴가를 제대로 쓰지 못해 근로시간이 길게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 유연근무로 노동 생산성 높여야
고령자와 아이 키우는 부모가 노동시장에 계속 머물게 하려면 획일화된 근무 형태를 다양하게 만들어야 한다. 김민섭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연구위원은 “고령층과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높이려면 단시간 근로 기회와 근로시간 선택권이 확대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 가지 방안은 현재 유명무실한 유연근무 제도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2024년 8월)’에 따르면 임금근로자 중 유연근무제를 활용하는 비율은 15.0%에 그쳤다. 유연근무를 하지 않는 사람의 절반가량(48.1%)은 이 제도를 활용하고 싶어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전문가들은 정부가 유연근무를 일률적으로 강제하기보다 다양한 선택지를 만들어주고 상황에 맞게 고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부연구위원은 “시차출퇴근, 재택근무 등 다양한 유연근무를 신청할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개별 회사 노사가 적합한 제도를 자율적으로 채택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여건이 어려운 중소기업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게 제도 컨설팅, 인센티브 등도 적극 지원해야 한다.

유연근무가 활발해지면 주 40시간의 틀 안에서도 주 4일제, 주 4.5일제 등으로 근무 형태가 다양해질 수 있다. 정 연구위원은 “유연근무 대상을 육아기 부모 등 특정 계층에 한정하면 낙인효과가 발생할 수 있으니 보편적 제도로 확산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근무 형태가 다양해지고 근로자의 쉴 권리가 확실하게 보장되면 더 나아가 연장근로를 유연하게 쓰는 것에 대한 근로자의 거부감도 줄어들 수 있다. 관리 단위를 월, 분기(3개월), 반기(6개월) 등으로 확대하는 대신 주 평균 근로시간 한도를 50시간 또는 48시간으로 줄이는 것도 방법이다. 근로시간 유연화로 근로자의 일·생활 균형, 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이룬다면 초고령사회의 노동시장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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