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명인열전]수필가로 등단한 제주 1호 버섯박사… “버섯 균주은행 세우는게 꿈”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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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제주대 고평열 박사

제주지역 1호 버섯박사인 고평열 박사가 제주대 연구실에서 버섯 균사체를 배양하고 있다. ‘버섯 균사체은행’을 만드는 것이 고 박사의 오랜 꿈이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제주지역 1호 버섯박사인 고평열 박사가 제주대 연구실에서 버섯 균사체를 배양하고 있다. ‘버섯 균사체은행’을 만드는 것이 고 박사의 오랜 꿈이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2일 제주대 생명자원과학대 식물병리학실. 책임연구원인 고평열 박사(55·여)가 현미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버섯 균사체 배양에 여념이 없다. 배지에서 배양한 건강한 균사체를 선발해 저온에서 보관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오랜 꿈인 ‘버섯 균주은행’을 설립하기 위해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땅에서 자라는 버섯, 나무에서 자라는 버섯 등 생태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균사체 배양 성공률은 20% 정도에 불과하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보관한 균주를 꺼내 또다시 균사체로 배양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다. 현재 300여 종의 균주를 보관하고 있다.

“버섯들을 살아있는 균사체로 배양해 보관할 수 있으면 필요할 때 꺼내서 언제든지 대량생산이 가능합니다. 기능성 물질 연구나 재배하는 이들에게 분양할 수 있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들고 인력이 필요해서 힘들기도 하지만 미래 제주의 자산을 확보하는 차원에서라도 균주은행은 꼭 있어야 합니다.”

○제주 최초의 버섯박사


고 씨는 2013년 제주대에서 ‘자생버섯의 생태 및 분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주지역에서 ‘1호’이자 지금도 유일한 버섯 박사다. 그는 제주지역 야생버섯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탐라광대, 관음흰우단, 노랑가루송이, 청환각, 구상장미 등 10종의 미기록종을 확인하고 한국균학회지에 발표했다. 2009년 국립산림과학원에서 발간한 ‘제주지역의 야생버섯’ 생태도감을 펴낸 주역이기도 하다.

생물자원관, 국립수목원, 국립공원연구원 등에서 발주한 버섯 조사에 빠질 수 없는 핵심 연구원으로 제주지역뿐 아니라 주왕산, 경주 등 다른 지역에서도 조사활동을 하고 있다. 식물분류기사를 비롯해 종균기능사, 생태복원기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자연생태해설, 버섯재배 등을 주제로 연간 50회 이상 강연도 한다. 2004년에는 수필가로 등단하는 등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다.

“답답한 일상에서 변화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라산과 오름을 걷기 시작한 게 마흔 즈음이었어요. 자연을 소재로 글을 쓰면서 나무와 꽃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고 싶었어요.”

이름모를 들꽃이 아니라 쑥부쟁이, 닭의장풀, 때죽나무 등으로 쓰고 싶었다. 그때부터 식물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식물을 보기 위해 땅으로 시선을 내렸는데 거기에는 버섯도 있었다. 2, 3년 하다 보니 꽃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됐다. 그에게 시시각각 변하는 버섯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 도전가치가 있는 미개척 분야

생태계는 동물계, 식물계, 균계 등으로 구분되는데 균계에 속하는 버섯은 분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떨어진 나뭇잎, 나뭇가지 등을 해체해서 새로운 자양분이 되도록 한다. 버섯 등 균류가 없으면 생명을 다한 식물이 지구를 뒤덮고, 새 생명 탄생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지 못했을 것이다. 생태계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버섯은 식용과 약용가치가 있는 귀중한 자원이기도 하다. ‘요정의 화신’으로 불렸던 버섯은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에게는 ‘신의 음식’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버섯은 항암 등 건강에 좋은 기능성 식품으로 이미 인정을 받고 있지만 버섯을 연구하는 인력은 손에 꼽을 정도다.

“현장에서 야생버섯을 분류하고 어떤 버섯인지를 알 정도로 실력을 갖춘 전문가는 극소수입니다. 최근 버섯동호회가 활성화되고 있지만 학문적 접근보다 식용이나 약용에 관심이 더 많아요.”

그는 “버섯을 공부해도 연구원을 뽑는 기관이 없고 취업도 힘들어서 학생들에게 외면을 받아 왔다”며 “쉽지 않은 분야이지만 성과가 크기에 도전해 볼 만하다”고 덧붙였다. 1900여 종의 국내 버섯 가운데 제주지역 자생버섯은 755종으로 확인됐다. 제주지역은 강우량이 많고 기온이 높을 뿐만 아니라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오름(작은 화산체), 곶자왈(용암암괴에 형성된 숲), 상록활엽수림, 중산간(해발 200∼600m) 목장지대 등 버섯이 자생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버섯은 땅속이나 죽은 나무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있다가 하루나 이틀 정도 버섯의 모습으로 잠깐 나타난 뒤 금세 사라지기 때문에 연구하는 사람이 부지런해야 한다. 그래야 버섯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버섯을 향한 무한 열정

고 씨의 유년은 경제적 어려움 탓에 녹록지 않았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뒤늦게 방송통신대에 진학했고 버섯에 대한 궁금증, 학문에 대한 열망으로 44세 때 제주대 농학과로 편입했다. 지금은 인터넷 검색으로 세계의 논문, 문헌, 도감 등의 전문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부실한 도감 외에는 버섯을 공부할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주변의 도움으로 버섯 연구하는 교수를 찾아갔다가 ‘아줌마가 공부할 학문이 아니다. 외국어에 능통해야 하고 박사과정까지 돈을 벌지 못하니 재력도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결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대학원에 진학하고도 선배나 버섯 전문가의 지도 없이 혼자 공부했어요. 책 하나 들고 사방이 막힌 벽 속에 혼자 갇힌 느낌이었어요. 그 즈음 농촌진흥청 김양섭 박사, 석순자 박사를 알게 됐어요. 제주도에 조사 나올 때마다 도움을 준 인연으로 겨울방학이면 농진청에 가서 현미경 보는 방법, 버섯을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방법, 미기록종을 위한 드로잉 등을 배웠어요. 두 분은 그렇게 귀인으로 다가오셨죠. 내 곁에 신이 머물다 간 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최고의 행운이었습니다.”

고 씨의 딸 이가은 씨(34)는 중국 톈진(天津) 난카이(南開)대에서 나방 분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경기 김포에서 물리교사로 재직 중인 큰아들 승룡 씨(28)는 내년에 물리학 석사과정에 도전한다. 작은아들 승학 씨(25)는 고 씨가 일하는 식물병리학실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어머니를 따라 숲속을 다니며 버섯을 채집한 경험 등이 버섯 연구에 대를 잇게 했다.

“좋아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이 미래를 열어 준다는 걸 자식들은 이미 경험했어요. 의무감 때문에 하는 공부와 다르다는 것을 안 거죠. 가족 모두가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자로서 나름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그날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요.”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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