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한 귀퉁이에 청첩장이 쌓이기 시작했다. 결혼 시즌이 왔다는 뜻이다. 한 장 한 장이 청구서다. 5만 원권이 처음 나온 2009년에 느꼈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7년 새 축의금 최저 금액이 3만 원에서 5만 원으로 훌쩍 뛰었다. 5만 원짜리를 두고 굳이 1만 원짜리 3장을 봉투에 넣는 건 “당신과 안 친해”라고 대놓고 내색하는 일 같아 마음이 켕겨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개인들이 5만 원권을 보유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조금 용도였다.
지출 증가가 걱정되긴 하지만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3포 세대’면서 결혼에 골인하는 청년들이 기특하단 생각도 든다. 이 시대 젊은이들에겐 부모 세대부터 투자해온 결혼 축의금을 회수하는 것조차 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비혼 선언’을 하고 친구들로부터 축의금을 돌려받으려는 젊은이들까지 나온다.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며 그동안 낸 축의금을 내놓으란 요구다.
경조금은 폐쇄적 농경사회에서 만들어진 상호부조 시스템이다. 이탈이 적고 이웃의 숟가락 수까지 꿰고 사는 마을 공동체 내에서 쌀, 포목 등 현물로 낸 축의금은 시간이 지나도 손실 없이 고스란히 돌아올 공산이 컸다. 하지만 6·25전쟁, 급격한 도시화로 이동성이 커지고 인간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이런 틀이 깨졌다.
화폐로 내는 축의금에는 인플레이션 문제도 생긴다. 시대가 변해도 축의금은 면피성, 보통, 적극적 축의금의 3개 등급이 유지된다. ‘1-2-3’ ‘2-3-5’ ‘3-5-10’ ‘5-10-20’ 비율이 반복되는 게 특징이다. 1990년대 초반 1만, 2만, 3만 원,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2만, 3만, 5만 원, 2000년대 중반 이후 3만, 5만, 10만 원이던 축의금은 현재 5만, 10만, 20만 원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다. 10여 년 만에 최저 등급의 면피성 축의금이 66.7%나 올랐다. 디플레이션이 우려되는 시대에 보기 힘든 인상률이다. 호텔 결혼식 등으로 일반 물가보다 가파르게 오른 결혼 비용이 반영된 탓이다.
대상이 한정된 부의와 달리 축의금은 계산이 어렵다. 집집마다 자녀 수가 달라서다. 이런 이유로 과거에 어른들은 다른 집 ‘개혼(開婚)’, 즉 형제 중 첫 번째 결혼 때 축의금을 제일 많이 냈다. 두 번째에는 개혼의 70∼80%, 세 번째에는 50% 정도로 금액을 낮추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혼, 재혼이 빠르게 늘면서 셈법이 난해해졌다. 다른 집 자녀가 재혼할 때 초혼 때와 같은 축의금을 내야 할지, 줄인다면 얼마나 적게 내야 할지 마땅한 기준이 없다.
반대로 자녀의 결혼이 늦어지거나, 아예 결혼하지 않는 자녀가 있을 경우 부모들은 축의금을 회수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모든 변수를 고려해 장기간 축의금 손익을 맞추려면 알파고의 계산 능력이 필요할 지경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몇몇 선진국들처럼 동성결혼까지 허용된다면 일이 더 복잡해진다. 최근 외신에는 일본IBM이 동성 파트너가 있다고 신고한 사원에게 회사 차원의 결혼 축의금을 지급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청년들의 비혼 선언을 두고 “결혼이 장난이냐”며 눈살 찌푸릴 어르신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높아진 결혼의 허들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장기간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는 게 부당하다고 느끼는 청년들의 선택은 그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그래서 내 주위에 비혼을 선언하는 젊은이가 있으면 불평 없이 축의금을 낼 생각이다. 결혼조차 힘겨운 사회를 만든 기성세대로서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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