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다시 공공성을 생각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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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오피니언팀장
이진 오피니언팀장
시간이 좀 지난 이야기다. 아는 이가 이사를 하고 아이가 다닐 어린이집을 알아봐야 했다. 부부가 맞벌이여서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가 가까운 전통시장을 가다 2층에 있는 민간 어린이집을 발견했다. 무작정 들어가 내부를 둘러봤다. 창문을 모두 반투명 비닐로 가려놓은 점이 무엇보다 못마땅했다. ‘아이들은 햇볕을 받고 자라는 건데….’ 시장의 번잡스러움도 걸렸지만 아이가 온종일 형광등 아래서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발길이 돌려졌다.

일단 아이를 교회 부설 어린이집에 맡겼다. 얼마 뒤 근처에 공립 어린이집이 문을 연다는 소식이 들렸다. 신청 기간을 손꼽아 기다려 찾아간 어린이집은 당연히 시설이 최신이고 창문도 큼직큼직해 햇볕이 한 아름 들어왔다. 바로 앞에는 자그마한 공원까지 있었다. 다만 지원자가 너무 많아 추첨을 했다. 추첨일에 엄마는 떨려서 못 가겠다며 아빠를 대신 보냈다. 남편이 전화로 ‘여보, 당첨됐어!’라고 알려줬을 때의 감격을 아내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적지 않은 맞벌이 부부가 속상해할 일이 또 벌어지고 있다. 일부 보육교사들이 연차휴가를 내고 한꺼번에 출근하지 않는 것이다. 평소에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속을 끓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닌데 이제는 아이를 맡겨도 되나 하는 불안감까지 덮쳐 온다. 한국민간어린이집연합회가 주도해 ‘우리도 생존해야죠’라고 현실론을 내세우니 아이 가진 부모들은 속수무책이다. 해결의 책임이 있는 중앙정부와 시도교육청은 누리과정 예산을 놓고 서로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몇몇 보육교사들의 집단행동과 부모들의 속앓이 배경에는 아주 많은 민간 어린이집과 너무 적은 공공 어린이집이라는 불균형 구조가 놓여 있다. 전체 어린이집 수를 100으로 하면 지난해 기준 민간은 95, 공공은 5로 나뉜다. 무상보육 정책이 시행되면서 민간 어린이집은 점점 늘어나지만 수준은 고르지 않다. 부모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은 생각만큼 눈에 띄지 않는다.

민간의 우위는 교육이나 의료 분야도 마찬가지다. 대학만 놓고 보면 국공립은 5곳 중 1곳이 채 안 된다. 나머지는 모두 사립대학, 즉 사학들이다. 고등학교는 사립이 수는 약간 적지만 위세만큼은 당당하다. 병원도 공공병원 수는 전체 10곳 중 1곳에 불과하다. 시장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는 미국에서도 공공의료기관 비율은 30%에 이른다. 이런 구조는 한국이 맨주먹으로 일어서는 과정에서 자리 잡았다. 정부가 대학을 세우고 병원을 짓기보다는 국민의 주린 배를 채워 주는 데 더 힘을 쏟아야 했던 결과다.

사학들과 민간 병원들은 이제 정부의 간섭이 거추장스럽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사학들은 등록금을 올리지 못하게 한다고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고 민간 병원들은 돈 벌 수 있는 길을 열어놓지 않는다고 불평이다. 그러는 사이 이미 한껏 비싸진 등록금을 대느라 학부모들은 허리가 휜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같은 감염병이라도 돌면 환자들은 치료해 줄 병원을 찾느라 허둥댄다.

대학 진학이야 성인의 선택이고 비용도 스스로 치러야 할 몫이라고 치자. 하지만 아이를 키우고 질병을 치료하는 일은 영리행위라고 해도 많건 적건 헌신과 희생을 요구한다. 바로 공공성이 개입해야 하는 지점이다. 공공성을 보장하려면 정부가 전체적으로 우선순위를 다시 조정하는 것이 먼저다. 나라살림이 어려워져 아무래도 지원하기 힘들다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해를 구해야 옳다. 떠넘기기를 하며 볼썽사나운 꼴을 보일 일은 아니다. 이것이 유권자가 정부의 진심을 믿고 공공성에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않게 하는 길이다.

이진 오피니언팀장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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