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배 학점 ‘F →A’ 조작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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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이 모교 대학전산시스템 해킹
미수강 과목도 ‘이수’로 변경
성적올려 조교장학금 받기도
학교선 6개월 지나도록 ‘감감’

지난해 학교수업을 많이 빼먹은 동국대 4학년 H 씨(22)는 올해 2월 졸업학년을 앞두고 학점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지난 학기 6개 과목에서 F학점을 받아 졸업학점 취득에 차질이 생긴 데다 나중에 취업할 때도 낮은 학점 때문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또 4학년이 되면서 조교직을 희망했는데 성적이 나쁘면 조교를 할 수 없었다. 이래저래 학점을 걱정하던 H 씨는 학과 술자리에서 귀가 솔깃해지는 얘기를 들었다. 학점을 바꿀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H 씨는 같은 학과를 졸업한 선배 L 씨(27)를 찾아가 낙제 학점들을 처리해줄 것을 부탁했다. 평소 취미로 해킹을 독학해 온 L 씨의 방법은 간단했다. ‘버프슈트(Burp Suite)’라는 패킷 감시프로그램을 통해 학교전산시스템 관리자의 ID와 비밀번호를 손쉽게 얻어낼 수 있었던 것. ‘버프슈트’는 제작된 웹사이트에 오류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개인정보 습득을 위한 해킹 목적으로 종종 악용된다.

L 씨는 관리자 ID로 로그인해 H 씨의 F학점 6개를 모두 A로 바꿨다. 이수하지도 않은 과목 3개도 추가로 입력한 뒤 A학점을 줘 졸업 요건까지 맞춰줬다. 3점 초반대였던 H 씨의 학점은 순식간에 4점대로 올랐다. 올 1학기 H 씨는 조교 직함을 달고 120여만 원의 장학금까지 받았다.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22일 학교전산시스템 관리자의 ID로 로그인한 뒤 학교 선후배의 학점과 이수과목을 조작한 동국대 졸업생 L 씨와 L 씨에게 성적표 조작을 의뢰한 H 씨 등 학생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입건자 가운데는 공무원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성적 조작을 의뢰한 학생도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L 씨는 관리자 ID를 이용해 2009년 2월부터 8월까지 학교전산시스템에 접속한 뒤 지인들이 이수하지 않았거나 F학점을 받은 과목엔 A를 주고 낮은 성적을 받은 과목은 삭제하는 방법으로 총 18차례 성적을 조작했다. 학교전산망의 보안은 아마추어 해커인 L 씨의 간단한 조작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전산시스템뿐만 아니라 학교의 관리감독도 무력했다. 동국대를 졸업한 뒤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L 씨는 교내 컴퓨터 실습실 폐쇄회로(CC)TV 앞에서 버젓이 학교전산망에 접속하고 성적을 위조했지만 학교 측은 6개월이 지나도록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사건은 사실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하던 H 씨가 L 씨에게 점수를 원래대로 해줄 것을 요구한 뒤 정황을 모르던 H 씨 부모가 우연히 딸의 떨어진 성적을 확인하고는 학교 측에 항의전화를 걸면서 들통 났다.

경찰 관계자는 “대학 성적 조작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학교전산망을 해킹해 성적을 바꾼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학교전산시스템과 이를 관리하는 인력체계가 학생들의 무단 침입에 무방비 상태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고 말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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