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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1월 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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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구구로 법정 통역인 모집… 공정성 위협
美-유럽선 이주민-통역사 대상 장기간 교육
서울의 한 지방법원에서 중국어 통역을 하는 배모 씨는 18일 통역이 아닌 증인 신분으로 법정에 서게 됐다. 배 씨가 통역을 해준 중국인 피고인이 통역 오류로 원심에서 억울한 판결을 받았다며 항소심에서 통역 내용의 진위를 가리자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 중국인은 “변심한 여자친구에게 선물로 준 물건을 ‘받아오다’란 뜻으로 말한 ‘取’를 배 씨가 ‘빼앗다’로 잘못 옮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북의 한 지원의 경우 최근 위장결혼 혐의로 법정에 선 중국인을 위해 화교 출신 중국음식점 배달원이 통역을 맡기도 했다. 피고인 측 통역을 해주던 외국인인권단체의 자원봉사자가 사정이 있어 재판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피고인이 동료 중국인을 통해 이 배달원을 소개받은 것. 이 배달원은 별다른 절차 없이 “거짓 없이 성실히 통역하겠다”는 선서만 하고 재판에 투입됐다.
국내 체류 외국인의 범죄가 매년 20∼30%씩 늘면서 외국인 재판도 급증하고 있지만 법정통역은 이 같은 추세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통역인이 부족한 데다 모집도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져 해당 언어와 법률지식, 문화적 차이 등에 전문성을 갖춘 통역인이 드물기 때문.
대법원의 ‘각급 법원 통역인 현황’에 따르면 광역시급 이하 지방법원은 통역이 한 명도 없거나 극소수에 불과하다. 상대적으로 통역 인력이 많은 수도권 법원도 몽골어나 베트남어 등 소수 언어의 통역을 구하지 못해 인근 외국인단체나 대학에 통역을 부탁하는 실정이다.
경남외국인노동상담소에서 통역상담을 맡고 있는 김모 씨는 “농촌일수록 다문화가정이 많아 외국인 아내들이 폭행을 당하거나 위장결혼 문제로 법원에 갈 일이 많은데 통역이 대도시에 몰려 있어 시골에선 통역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전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음식점 직원처럼 검증되지 않은 통역이 재판에 참여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김진아 교수가 8월 판사 4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직업통역사 대신 재판 당사자의 친구나 친척 등을 통역으로 써본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22%에 달했다.
김 교수는 “법정통역은 피고인의 부주의하고 부정확한 발언까지도 있는 그대로 옮겨야 한다”며 “통역이 친분에 흔들려 피고인의 말실수를 눈감아주거나 누군가의 편을 들어준다면 공정한 재판을 해칠 공산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주민 역사가 오래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현지어에 능숙한 외국인 이주민이나 자국 통역을 대상으로 일정기간 법정통역 전문교육을 한 뒤 공인자격증을 부여하고 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