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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2월 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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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 쓴 적이 없는 소크라테스가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n)?”라는 물음으로 철학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그것은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물음이라고 본란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그 단순한 물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런 깊은 의의를 가질까.
모든 물음은 행동이 잘 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가령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수건으로 닦고, 빗질을 한다. 그 모든 행위는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머리를 빗으려고 빗을 집으려 했을 때 빗이 항상 있던 자리에 없다면, “빗 어디 갔어?” 하고 묻게 된다. 빗이 제자리에 있었다면 그런 물음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대부분 행동은 무의식적,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며 그것이 잘 되지 않을 때 의식이 깨어나고 의문을 던지게된다.
그렇다면 행동이 가장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언제인가. 즉 엄청난 궁지에 몰렸을 때, 가장 큰 난관에 봉착했을 때는 언제인가. 바로 죽음에 직면했을 때이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아테네는 전쟁으로 흥하고 전쟁으로 망한 나라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항상 죽음과 대면하고 살았다. 메디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에 비해 엄청나게 큰 나라였고 그런 나라가 대함대를 끌고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스인들의 심정은 곧 ‘죽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제1차 메디아 전쟁 때에는 사실 양쪽에서 비슷한 사상자가 났을 뿐인데도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뛰어와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외치고 쓰러졌다는 것은 그들의 기쁨과 동시에 그들의 공포가 얼마나 컸나를 역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기 마련이고, 그것이 가장 첨예화되어 표출된 것이 바로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그러므로 그 물음은 엄청난 난관(아포리아·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에 부닥쳤을 때 묻는 물음이며, 완전한 무지의 상태를 표현하는 물음이다. 가령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결혼하느냐를 묻는 것은 그래도 누군가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의 물음이다. 그러나 ‘결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는 것은 도대체 뭐가 뭔지를 모르는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그런 완벽한 무지의 상태에서 던지는 물음은 사물에 대한 전면적인 앎을 요구한다. 그것은 그 물음이 무엇으로 ‘보이는가’나, ‘되는가’나, ‘인식되는가’나, ‘말해지는가’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묻는 데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 물음은 사물에 대한 부분적 앎이 아니라 전면적인 앎, 사물의 존재 전체를 제시해 줄 것을 요청하는 물음인 동시에 전체와 부분을 혼동하지 말라는 요구도 내포하고 있다. 또 사물의 존재, 즉 그것‘임’을 물은 것이지 그것 ‘아닌’ 것을 물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한 사물을 다른 것으로 환원하지 말라는 것, 즉 각 사물에 자기 동일성을 확보해 주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구는 나중에 ‘정의’의 방법으로 발전한다.
가령 생물학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 물음에 온전히 대답하기 위해서는 생물학 전체가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그 물음이 요구하는 앎은 근본적이며 철저하다. 모든 개별 학문은 자기가 대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가를 전면적으로 밝히는 것이며, 그런 면에서 모두 소크라테스적인 물음 방식에 따르고 있는 셈이다.
최화 교수 경희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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