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살아보니]버팅/영어유학 '실패'는 왜 외면하나

  • 입력 2003년 7월 4일 17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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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 지하철 안에서의 일이다. 40대 후반쯤 되는 샐러리맨이 내게 대뜸 다가와서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캐나다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는 반가워하며 초면인 나에게 자식들을 캐나다로 유학 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며 조언을 구했다. 그가 중간에 내리는 바람에 많은 설명을 해주지는 못했지만 예전 고향인 밴쿠버에서 외국인 고등학생들에게 영어교육(ESL)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많은 한국 부모들이 자식들의 유학에 대해 환상을 가진 듯하다. 그러나 이들은 많은 아이들이 유학생활에 실패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린 자녀들을 오랜 시간 동안 연수나 유학을 보내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입시지옥’이라 불리는 한국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정신적 성숙이 이뤄지지 않은 그들은 가혹한 현실에 부닥치게 된다.

내가 밴쿠버에서 가르친 한국 고등학생들은 영어에만 매달릴 뿐 역사 과학 수학 등 고등교육 과정에서 꼭 배워야 할 과목들은 등한시했다. 영어로 모든 수업이 진행되는데 따라가기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치우친 교육을 받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또 다른 문제는 유학을 가더라도 굳이 영어를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생활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밴쿠버만 해도 200만 인구 중 4만여명이 한국인이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상점 비디오점 식당 노래방 교회 등 이미 한국 문화권이 형성돼 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 자제력이 부족하고 고향과 친구들이 그리운 학생들에게 그곳은 좋은 피난처가 될 것이다. 그뿐인가. 요즘 같은 세계화시대에 인터넷과 값싼 국제전화카드는 이들에게 모국어를 계속 사용하게 하는 훌륭한 수단이다.

일년에 두세 번 밴쿠버에 가보면 도심 식당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테이블마다 중국 일본 한국 베트남 출신 학생들이 끼리끼리 앉아 담소를 나누는 것이다. 과연 저 학생들이 하루에 얼마나 영어로 생각하고 대화할까. 캐나다의 고교생들은 주말파티나 아르바이트, 아이스하키와 자동차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하지만 유학생들이 이런 것들을 공유하면서 대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유학생들은 아웃사이더가 되어 술과 담배, 마약과 섹스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하나, 청소년들은 한국에서도 영어를 잘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 음악 TV 책 인터넷 등 얼마나 다양하고 훌륭한 방법들이 많은가. 사실, 지금 내가 출강하고 있는 대학의 제자들도 영어실력이 수준급이다. 평생 외국에 나가보지 못한 학생들이지만 말이다.

지금도 한국의 많은 학생들이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어린 학생들에게는 언어적 문제나 문화적 쇼크, 공부에 대한 중압감과 냉혹한 주위환경을 이겨낼 수 있도록 든든한 힘이 되어 줄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1966년 캐나다 출생. 캐나다의 사이먼프레이서대, 몬트리올대에서 사회교육학과 정치학을 전공. 8년 전 한국에 와 서강대와 한양대 등에서 영어교육(ESL)을 해왔다. 1999년 한국인과 결혼해 네 살 된 딸을 두고 있다.

로빈 버팅 한양대 영어교육과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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