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위 성과와 현주소]'환란극복'서 '초라한 말년'

  • 입력 2002년 9월 12일 19시 01분


《노사정위원회가 기로에 서 있다. 6·25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란 말까지 들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98년 발족된 노사정위는 지금까지 전국교직원노조 합법화와 정리해고 도입 등 126건의 각종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정권 말기인 올해에는 주5일 근무제 합의 실패와 공무원노조 허용 합의 결렬 등으로 한계를 보이며 그 위상도 흔들리고 있다. 그동안의 성과와 현 주소, 나아갈 방향 등을 점검해 본다.》

올 7월 22일 늦은 밤 서울 여의도 하나증권빌딩의 노사정위원회 대회의실.

장영철(張永喆) 노사정위원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노사정이 주5일 근무제 도입에 합의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따라 노사정위는 그동안의 논의 내용을 정부로 이송하겠습니다. 이의 있습니까?”

이날 제24차 본회의에 참석한 노동계와 경영계 정부 대표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모두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윽고 장 위원장은 의사봉을 3번 내리쳐 결렬을 확인했다.

이날의 합의 실패는 주5일 근무제라는 특정 안건에 국한된 단순한 사안이 아니었다. 이는 노사정위가 발족된 뒤 5년 만에 처음으로 발생한 ‘미합의 사태’로 노사정위의 존립 기반을 뿌리째 뒤흔드는 ‘강진(强震)’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화와 타협으로 노·사·정 3자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공동이익을 모색해 오던 노사정위의 틀에 균열이 생긴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지만 이날의 미합의 결정은 노사정위가 더 이상 원만한 기능을 하기 어렵게 됐다는 것을 공식 확인하는 셈이 됐다.

▽성과〓1998년 1월 발족한 노사정위는 노·사·정 3자가 합의를 통해 노사 문제를 해결하는 토대가 돼 왔다. 또 해외투자자들이 ‘한국 노동계가 지나치게 전투적’이라는 생각을 털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결과 ‘한국은 파산국가’라는 이미지를 씻고 해외자본 유입이 촉진됐다.

노사정위는 출범 2주일 만인 1998년 2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 합의했다. 사회협약은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 도입, 공공·금융부문 구조조정 등을 추진하는 기본틀이 됐다.

같은 해 9월에는 노조의 정치활동 보장을, 같은 해 10월 전국교직원노조 허용을 각각 합의했다. 2000년 7월에는 금융구조조정을 원활하게 할 ‘금융 대타협’을 이끌어냈다.

노사정위는 발족 이후 지금까지 11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회의를 열어 140여건의 의제를 논의했다. 이는 연평균 260여 차례의 회의를 개최한 것으로 공휴일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노·사·정이 머리를 맞댄 것이다.

무엇보다 이해 관계가 다른 노·사·정 3자가 ‘합의문화’를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사정위는 전체위원의 교체시점을 기준으로 1, 2기 등으로 나눠지는데 1999년 9월부터 현재까지 3기가 계속되고 있다.

▽현 주소〓현 정부에서 노사정위의 대미(大尾)를 장식할 것으로 기대했던 주5일 근무제 합의가 무산됐다. 이를 계기로 노·사·정 3자의 합의문화는 과거의 대립과 갈등문화로 뒷걸음질친 것으로 풀이됐다.

노동부가 나서 정부 입법안을 만들었지만 그동안 노사정위에서 논의됐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노사정위는 공무원에게 단결권을 부여하는 안건도 올 7월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공무원조직체의 명칭과 시행시기, 노동권 인정범위 등의 핵심쟁점에 대해 노동계와 정부간에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노사정위는 현재 마지막 남은 이슈인 비정규 근로자의 보호대책을 논의 중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안건도 합의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올 5월 초 노·사·정이 비정규직 관련 1차 합의문을 만들었지만 세부 항목에서 노사간 견해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명암의 배경〓노사정위가 발족 초기에 상당한 결실을 본 뒤로 점차 한계를 드러낸 것은 참여 주체의 생각과 자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당시 노·사·정이 보여주었던 양보와 타협의 정신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1998년 ‘2·6 사회협약’에서 정리해고 도입에 합의할 당시 박인상(朴仁相) 한국노총위원장은 눈물을 흘리며 업종별 대표자들을 설득했다. 박 위원장은 “정리해고 도입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제도가 최후에 사용되도록 투쟁하자”고 호소해 동의를 이끌어냈다.

경영계도 ‘구조조정의 해일’이 몰아치자 5대 그룹 총수들이 ‘빅딜’을 발표해 손발과도 같은 계열사들을 잘라냈다. 또 5개 시중은행이 퇴출당했고 수많은 기업들이 자산매각이나 지분매각 등에 적극 나섰다.

그러나 외환위기 초기의 어려움이 점차 사라지자 그러한 양보와 타협의 분위기는 점차 옅어져 갔다. 노·사·정 모두 제몫 챙기기에 나선 것이다. 노사 양측은 2000년 10월 스스로 작성한 근로시간단축 기본합의문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부 역시 공무원노조를 허용하기로 한 약속을 뒤집었다.

▼노사정위 제2창업 구상▼

노사정위원회는 ‘이제 역할이 끝났다’는 외부 지적 등을 고려해 ‘제2의 창업’에 착수했다.

▽자구 노력과 전망〓노사정위는 지금까지의 활동을 ‘근대화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에 집중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노조의 정치활동 허용이나 근로시간 단축(주5일 근무제) 등은 선진국들이 20세기 초에 이미 해결했던 사안들이었다. 노사정위는 그동안 추진해 온 노사 관계의 하드웨어에 적합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으로 방향을 맞췄다. 이에 따라 조만간 ‘21세기 노사관계발전위원회’를 새로 만들어 2003년 1월까지 가동할 예정이다.

21세기 노사관계발전위는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과 노동시장 변화에 발맞춘 중장기적 전망에 따라 고용과 복지부문 등에서 새 정책과제를 발굴하기로 했다. 노사정위는 “새로 논의할 주제들은 노사 모두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적극 수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외부 시각〓노사정위의 새로운 구상에 한국노총은 긍정적이지만 민주노총은 회의적이다. 민주노총은 그동안 정부나 경영계가 자기 입맛에 맞는 노사정위 합의사항만 지켰다며 노사정위를 전면 개편해야 참여를 고려하겠다는 방침이다.

노동부도 노사정위가 노사 관계를 총괄하는 정책을 다루는 것에 못마땅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있다. 노동부는 “노사 관계의 새로운 틀은 상시 검토해 추진해야지 한시기구가 논의할 성질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최근 경제 5단체도 일부 현안에 대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어 노사정위에 참여하는 한국경영자총협회의 대표성에 논란이 일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이원덕(李源德)원장은 “노사정위가 합의를 해야 할 사안과 협의로 충분한 사안 등으로 나누고 참여 주체인 노사정의 기대수준을 사안별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네델란드에선▼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는 노·사·정 3자가 함께 참여하는 기구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유럽 국가 중 노사정기구가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네덜란드의 경우 1945년 노동계가 주도해 노동재단이 설립됐다. 노동재단은 노사 양측이 수시로 만나 주요 현안을 협의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1950년 노·사·정이 참여하는 사회경제위원회(SER)를 만들었다. SER는 노조 대표와 사용자 대표, 정부가 지명한 대표가 11명씩 총 33명으로 구성됐다.

SER는 출범 초기에는 임금상승 억제와 노사관계 안정 등에 초점을 맞췄으나 1980년대에 발생한 ‘네덜란드병’을 치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실업률이 10% 넘게 치솟고 국가경쟁력은 바닥으로 추락하는 등 국가 위기를 겪고 있었다.

SER는 1982년 ‘바세나르협약’을 체결해 임금을 동결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대타협을 이끌어냈다. SER는 이후 활동범위를 계속 넓혀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대부분의 사회경제정책은 SER 안에서 도출되고 있다.

SER는 그동안 정치권 등으로부터 비용이 많이 든다는 등의 비난을 받아 종종 해체론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노·사·정이 힘을 합쳐 “SER는 국민적 기구이기 때문에 어떠한 세력도 해체할 권한이 없다”고 맞서 이를 지켜냈다.

노사정위원회 오병훈(吳炳勳) 박사는 “네덜란드는 사회의 밑바탕에 이해 관계가 다른 집단간의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며 “SER의 합의는 노·사·정이 반드시 이행함으로써 평화적 노사 관계를 유지하는 전통을 확립했다”고 평가했다.

이 진기자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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