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섬' 삼척 하정마을]천막살이 6일째 "밤이 두려워요"

  • 입력 2002년 9월 6일 18시 37분


강릉지역의 한 이재민이 비가 뿌리는 움막에서 우두커니 앉아 점심을 짓고 있다.강릉연합
강릉지역의 한 이재민이 비가 뿌리는 움막에서 우두커니 앉아 점심을 짓고 있다.강릉연합

강원 수해지역에는 5일 오후부터 다시 비가 내렸고 바람도 거셌다.

낯선 이웃집에서, 강변에 친 텐트 안에서, 콘크리트 냄새 풍기는 교실에서 이재민들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지친 몸을 뉘었다. 이날 오후 6시경 강원 삼척시 미로면 하정리. 전체 50여 가구 중 겉으로나마 성한 집은 대여섯 채뿐인 수해의 참상이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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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하정 1반과 2반 사이를 흐르는 오십천이 범람해 전기, 통신, 물이 모두 끊긴 지 엿새째. 미로면으로 통하는 미로교도 무너져 4일에야 군 헬기를 통해 구호품을 받았다.

오십천변 모래밭에 텐트를 친 김거현(62) 김순영씨(56) 부부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 불을 밝힐 양초도 없었다. 오십천이 범람하던 날 밤 맨발로 옷만 걸치고 뛰쳐나왔다. 집은 무너지고 첫 수확을 앞둔 포도밭 1600여평은 나무 한 그루 남지 않았다.

모래 위에 돗자리만 깔고 그 위에 이불 한 채가 전부인 텐트가 바람에 몹시 흔들렸다. “바람이 더 세게 불면 여기서도 쫓겨나겠지”라는 남편의 말에 “컨테이너박스가 가장 필요해요”라고 부인이 거들었다.집이 그런대로 성한 이웃을 전전하며 잠을 잤지만 몸도 마음도 불편해진 4일 서울에 사는 경찰관 외아들이 텐트를 짊어지고 찾아왔다.

처마밑에 침상 깔고 잠자/비바람맞으며 추위와 맞서/"통사정해서 구호품 맏아"

“추석 때 다시 오겠다는 걸 극구 말렸어요. 잘 때가 있나 먹을 게 있나….” 말을 잇지 못하던 부인 김씨는 “그래도 오늘은 자원봉사자가 가져다 준 주먹밥을 먹어서인지 부자가 된 기분”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마을이 완전히 어둠에 덮인 오후 7시경 오십천 너머에서 이은순씨(51)가 피우는 담뱃불이 반짝였다.

이씨의 집은 진흙이 허리까지 찼다. 이씨와 부인 박명희씨(51)는 처마 밑 1평 공간에 블록 8짝을 놓고 그 위에 베니어판을 깔아 간이침상을 만들었다. 비만 겨우 피할 뿐 바람은 고스란히 맞으면서 엿새를 버텼다.

“3일 마을 노인들이 삼척시청까지 네다섯 시간을 걸어가서 ‘굶어죽겠다’고 사정하니까 다음날 시장이 헬기를 타고 와서는 한다는 말이 ‘고립된 줄 몰랐다’였어요.”

속이 상해 술을 마셨다는 이씨는 “도로 확장공사를 한다고 오십천에 H빔 수십 개로 가교를 놓더니만 그것들이 물길을 막았다”며 한숨지었다. 부인 박씨는 “오늘까지 산에서 샘물을 받아 마셨다”며 “내버려진 동네 같다”고 고개를 저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간마을보다 형편은 낫지만 대피소의 이재민들도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하천변에 텐트치고 하루 연명/바람소리에 "날아갈까" 철렁/불밝힐 초도 없어 '암흑생활'

오후 11시경 강원 강릉시 장현동 모산초등교 한 교실에서는 60, 70대 할머니 10여명이 잠을 못 이룬 채 TV 뉴스를 보고 있었다.

“지난해 150만원을 주고 산 수의를 잃었다”는 권오자(權五子·74)씨는 다른 무엇보다 손자들 사진이 없어진 걸 아쉬워했다.

비바람이 거세진 창 밖을 지켜보던 이화선(李花善·62)씨는 “승합차 속에서 밤을 지샐 큰아들 내외가 걱정이 된다”며 “며느리 결혼 패물을 챙기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비바람에 기온까지 뚝 떨어진 이날 밤, 복구작업에 비지땀을 흘리던 이재민들은 길에 내놓은 가재도구를 비닐로 덮고 집 앞에 모래주머니를 쌓는 등 또 닥칠지 모르는 침수 위험에 불면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강릉〓경인수기자 sunghyun@donga.com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주민들, 의약분업 일시해제 요구▼

태풍 피해에 따른 복구작업이 한창인 충북 영동군 수해지역에서 피부병과 눈병, 배탈 환자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의약분업 대상지역인 일부 읍면 주민들이 의약품 구입이 어렵다며 일시적으로 의약분업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6일 영동군보건소에 따르면 수해 발생 후 전날까지 보건소를 찾은 피부병 눈병 환자가 모두 377명으로 하루 동안 249명이나 늘었다.

또 배탈이나 설사 증세 및 외상 때문에 치료받은 환자도 962명에 이르는데다 일교차가 커지고 계속되는 피해 복구작업으로 감기몸살 환자도 점차 늘고 있다.

하지만 영동군 내 11개 읍 면 가운데 최대 피해 지역인 영동읍과 황간, 용산면에 살고 있는 3만여명의 주민은 지난해 7월 의약분업 대상 지역으로 지정돼 필요한 약품을 구입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건지소마다 하루 300여명의 환자들이 붐비는 탓에 약국에서 약품을 구입하려고 해도 병 의원이나 보건소 등의 처방전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 3개 읍면은 지난해 7월 의약분업 실시 때 거주지 내에 병의원이나 약국 중 하나가 없거나 병의원과 약국 간 거리가 1.5㎞ 이상이면 의약분업에서 제외한다는 규정에 해당되지 않아 의약분업이 적용됐다.

영동군 황간면의 한 주민은 “감기에 걸려 약국을 찾았으나 처방전이 없으면 약을 살 수 없다는 약사의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며 “수해복구 기간만이라도 의약분업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해제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충북도 홍한표(洪韓杓) 보건위생과장은 “국립의료원과 경기도청 등의 의료진을 지원받아 침수지역을 중심으로 진료활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그러나 특별재해지역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규정상 의약분업 지역에서 해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영동〓장기우기자 straw825@donga.com

▼태풍피해 4조2900억▼

중앙재해대책본부는 6일 오후 4시 현재까지 태풍 루사로 인한 전국의 재산 피해가 4조2900여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밝혔다. 중앙재해대책본부는 “강원 동해 삼척 등 고립지역의 조사가 본격화되면서 피해 규모가 계속 늘고 있다”며 “최종 피해액은 훨씬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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