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강릉 산불/현지표정]"또 불…" 넋잃은 고성

  • 입력 2000년 4월 7일 20시 03분


“다 탔어. 하나도 못 건졌어….”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강원 강릉시 사천면 석교1리와 고성군 토성면 운봉리 주민들은 넋을 잃은 채 눈물을 흘렸다. 마을은 마치 포격을 받은 듯 시커멓게 타버렸고 곳곳에서 계속 연기가 피어올라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강릉▼

7일 오전 사천면 석교1리 4반 일명 골말마을. 마을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다시피 했다. 자욱한 연기와 매캐한 냄새때문에 절로 눈물이 났다.

이날 오전 8시 50분경 마을에서 동북쪽으로 1㎞ 가량 떨어진 사천공원묘지에서 발생한 산불은 초속 25m의 강풍을 타고 20여분 만에 마을을 덮쳤다. 이 마을 14채의 가옥 가운데 7채가 전소됐다.

날벼락을 맞은 듯 집안에서 뛰쳐나온 주민들은 “전쟁이 나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라며 망연자실했다.

주민 김창기(金昌起·41)씨는 오전 9시 10분경 200여m 떨어진 야산에 불길이 번지는 것을 보고 급히 수도에 고무호스를 연결해 집 뒤편의 소나무숲을 향해 물을 뿌렸다. 하지만 불길은 불과 1분만에 강풍을 타고 김씨의 집을 휘감았다.

“볍씨도 하나 못 건졌어. 아이들 컴퓨터도, 경운기 콤바인도 모두 불에 타고 말았어….”

김씨는 마치 꿈을 꾸는 듯 타들어가는 집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주민 조경환(趙慶煥·41)씨는 집에 불길이 번지자 소방대원을 부르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그러나 20여분 만에 찾아온 소방차는 인근 사천중학교가 불에 탈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핸들을 돌렸다.

80대 노인인 최진해(崔鎭海)씨는 5대째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해 온 도자기와 노리개 등 조상의 유품을 모두 불에 태웠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을 주민들은 사천면 마을회관에 모여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라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고성▼

화마가 덮친 토성면 운봉마을도 폐허로 변했다. 운봉산에서 마을로 옮겨붙은 산불은 김영진씨(64)의 축사에서 4년생 암소와 5개월 된 송아지를 시커멓게 태운 뒤 삼포쪽으로 번져갔다.

김씨는 “도망가라고 암소를 풀어 줬지만 새끼가 있어서인지 도망가지도 못하고 타 죽었다”며 눈물을 훔쳤다.

사람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만큼 강하게 부는 바람을 타고 산불은 순식간에 마을을 덮쳤다. 경찰 기동타격대와 소방대원들은 불길이 워낙 강해 환한 대낮인데도 방독면을 쓰고 진화에 나섰다.

김씨는 “고무통에 물을 받아 놓았지만 한번 뿌려 보지도 못하고 집을 빠져 나왔다”며 급박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날 불로 이 마을 29채의 가옥 가운데 8채가 전소됐고 축사 창고 등도 모두 불에 탔다.

인근 죽왕면 삼포1리의 이정근씨(39)는 “3년 전부터 길러온 개 170마리가 불에 타 죽거나 달아났다”며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이날 오후 간신히 불길이 잡힌 뒤에도 주민들은 혹시 불씨가 되살아날까봐 연기 나는 곳마다 물을 퍼붓기에 여념이 없었다.

<강릉고성〓최창순·경인수·정위용기자> sunghy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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