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정부 1년/공과진단 과제점검]최원식/사회-문화

  • 입력 1999년 2월 19일 19시 33분


《25일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이끄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지 1년. 새정부 1년의 성적은 몇점일까.

동아일보는 새정부 1년의 공과를 진단하고 남은 4년의 과제를 제시하는 정담(鼎談)을 마련했다. 참석자는 김학준(金學俊·인천대총장)동아일보논설고문 박승(朴昇)중앙대교수 최원식(崔元植)인하대교수. 이들은 정담내용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3개분야로 나눠 직접 집필했다. 정담은 17일 오전 동아일보사 8층회의실에서 진행됐다.》

김영삼정부에 이어 개혁정권의 후계로서 김대중정부가 출현한 것은 역사적이다. 더구나 그것은 선거에 의한 최초의 정권교체라는 점에서 한국민주주의의 성숙을 알리는 중대한 이정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역사적 사건이 내재적 역량에 못지 않게 외생적(外生的)변수에도 크게 의지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냉철히 인식해야 한다.

사실 김대중정부의 권력기반은 취약하다. 3공(共)이후 역대 정권의 집요한 지역차별로 말미암아 주로 호남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김대통령은 보수연합에서 이탈한 김종필총리의 호서권(湖西圈)을 끌어들임으로써 겨우 호남포위를 돌파할 단초를 마련했지만, 이 역시 독자적 집권역량으로서 충분하다고 할 수 없었다.

요컨대 IMF사태가 야기한 김영삼정부에 대한 전국민적 실망감이 정권교체에 큰 몫을 했던 것이다.

‘3김(三金)청산’을 내세운 차세대 정치지도자들의 실력부족도 중요한 변수로 거들었음은 물론이다. 사실 토니 블레어를 비롯한 젊은 지도자들이 세계정치사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새시대를 열어가는 것을 보노라면 우리의 낙후한 정치문화의 지속에 일정한 책임을 나누어 맡고 있는 ‘3김시대’의 극복이 새로운 차원에서 여전히 절실하다는 점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그런데 ‘3김 청산’을 외쳤던 후계 정치가들이 비전이나 경륜이나 능력, 모든 면에서 ‘3김’에 미달이었다.

이처럼 안팎의 요인들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출범한 김대중정부는 지난 1년간 노련한 경륜으로 국가부도 사태를 성공적으로 방어함으로써 대선 당시의 지지율을 넘어서 비교적 높은 국민적 동의를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김대중정부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였다.

남북 분단, 계급과 계층 대립, 그리고 고질적인 지역분열에 시달려 온 우리 사회에서 분단과 대립과 분열을 넘어선 국민적 통합의 실현이라는 핵심적 과제의 중대성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적확한 구호가 아닐 수 없다. 이제부터는 이 국가적 목표에 내실을 부여하는 작업에 총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이 작업에서 문화의 문제에 주의를 촉구하고 싶다. 정치가들은 걸핏하면 내세운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므로, 한국문화를 꽃피우는 데 앞장서겠다고. 그런데 정작 문화는 항상 정치 경제 사회 다음에 장식으로 꼬리에 붙곤 한다. 그나마 선거철이 지나가면 문화는 공약집 속에 묻혀 잊혀지고 허구한 날 정쟁으로 날이 새고마는 판이다. 물론 한 사회의 제도적 골간을 이루는 정치와 경제의 중요성을 무시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런데 그처럼 많은 정치가들이 그처럼 오랫동안 논의를 거듭, 해방 후 반세기 넘게 실험을 했어도 한국사회는 여전히 난맥이다.

한국처럼 종교인구가 넘치는 나라가 없건만 종교적 품성은 예배당과 절에만 보관되어 있는 것인지 실생활에서는 거의 흔적이 없는 듯이 보이는 것은 비신자(非信者)의 한낱 편견일까.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좀 엉뚱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나는 한국사회의 문화역량의 부족 내지 결핍에 근인(根因)이 있다고 믿는다. 문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닦아서 ‘우리’를 발견해가는 회랑(回廊), 즉 사심을 넘어 공심 또는 공공성을 발견해가는 지각의 과정이다. 그런데 5천년 문화민족이란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어느 틈엔가 문화, 즉 공공심이 행방불명이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그림을 보고, 좋은 영화를 보고, 좋은 공연을 관람하면서 우리들 각자의 난잡해진 삶을 가다듬고 공동선에 대해 사유할 때 제도 개혁이 우리들 생활 밖에서 겉도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기반으로 뿌리내릴 터이다. 제도개혁과 의식개혁이 제휴해서 병진할 때 거기서 정쟁속에 분열된 한국사회는 비로소 근대적 국민으로서 재탄생할 것인데, 이 바탕에서만 평화통일이라는 일대사업을 제대로 성취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될 것이다.

한국사회는 현재 날카로운 과도기에 처해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를 움직여온 박정희식 개발독재 모델과 미국에서 불어오는 신자유주의 바람을 발본적으로 재검토해서 새로운 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모델을 모색하는 것이 과도기의 진정한 몫일진대, ‘생각하는 국민’의 중지(衆智)가 지금보다 더 절실할 때는 없다. IMF사태와 함께 몰아친 구조조정 바람에 위축되어가는 한국문화를 흥기시킬 획기적인 청사진을 마련해야 한다. 국민적 대통합을 통해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쇄신할 광범한 문화운동을 일으킬 더없이 좋은 때가 왔다.

▼정담 집필자

최원식(崔元植)

△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

△인천환경운동연공동대표

△인하대교수(현)

△창작과비평사 주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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