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哲기자] 지난 22일 인천항을 통해 귀순한 김영진(51) 유송일씨(46)가족 8명은 3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탈출부터의 경위를 밝혔다.
▼유송일씨▼
청진 오중흡대학 후방부관리과장이던 95년1월경 사무실에서 노동신문에 난 남조선청년학생들의 쌀시장개방및 쇠고기수입 반대시위 기사를 읽고 무심결에 『개새끼들, 얼마나 배불리 먹었으면 쇠고기수입에 반대하는가』라고 말했다가 10일간 구류장에서 취조를 당했다.
8월에는 업무관계로 상급자(경리부학장)와 다퉜다. 11월에 출당(黜黨)됐고 12월에는 직무에서 해임됐다. 김정일 아래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남쪽에 가야겠다고 결심, 준비를 시작했다.
작년 3월4일 청진에서 열차로 중국도문(圖們)과 맞닿은 남양에 갔다. 군대에서 24년을 생활, 경비의 허점을 잘 알았다. 군복을 입은데다 제대증명서를 가졌기 때문에 안전부요원들의 의심을 받지 않고 어머니와 처 아이들을 데리고 달밤에 두만강을 건넜다. 들키면 안전부요원을 매수하려고 조선돈 1만5천원을 준비했으나 필요가 없었다.
심양(瀋陽)에서는 조선족집을 돌아다녔다. 어머니는 건강이 악화, 6월에 돌아가셨다. 9월에 두차례 북경(北京)한국대사관을 찾아갔는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로 아내와 심하게 다투고 헤어졌다.
올해 1월7일 조선족이 『한국에 갈 길이 열렸다』며 한 사람을 소개해줬다. 그의 말에 따라 우리는 기차를 타고 20일 한 항구에 갔다. 그는 우리를 배밑창에 데려다줬다. 배밑창에 있을 때 김영진씨 가족이 탔다. 김씨 가족은 이때 처음 봤다.
▼김영진씨▼
작년3월 북한을 탈출, 중국농촌에서 일했고 도시식당에서도 근무했다. 북경한국대사관에 두번 갔다. 첫번째는 대사관을 못찾았고 두번째는 찾아 귀순신청을 하고 직원도 만났으나 중국과의 외교관계 때문에 도와주지 못한다고 했다.
조선족을 통해 남한사업가 「박사장」을 알게 돼 도움을 많이 받았다. 1월18일 박사장이 조선족을 데려와 『이 사람을 따라가라』고 했다. 그를 따라 한 부두에 도착, 밀항선을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