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 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
20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이 수원FC 위민과의 경기 시작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KBS 캡처
‘내고향여자축구단’은 여러모로 미스터리한 팀입니다. 북한의 스포츠 시스템에서 어떻게 유일하게 기업 후원형의 외피를 쓴 구단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부터 북한 전문가들을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기업 후원 구단임에도, 4.25체육단이나 압록강체육단 등 명문 체육단을 제치고 최고의 선수들을 스카우트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것도 놀랍습니다.
북한에서 여자 축구팀은 남자 축구팀과 함께 유지되는데, 왜 내고향여자축구단의 스폰서 기업인 ‘내고향무역회사’만은 남자팀은 없고, 여자팀만 키우는 것일까요.
국가보위성 소속인 내고향무역회사는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담배를 만들던 회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주류, 스포츠용품, 위생용품 제작에 이어 전자제품에까지 손을 대고, 해외에도 적극 진출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축구연맹 여자챔피언스리그(AWCL) 대회 우승상금이 100만 달러(15억 원)임을 감안하면, 이제 내고향무역회사는 프로구단 운영을 통한 외화벌이에도 눈을 뜬 것은 아닐까요.
이 정도면 독점으로 간주돼 견제를 받을 만도 하건만, 김정은은 공식 외부 행사에서 내고향담배공장 담배를 피우며 대놓고 밀어주고 있습니다. 내고향의 진짜 소유주는 누구일까요.
17일 인천공항에 도착한 내고향여자축구단과 북한 관계자들. 맨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이 리유일 감독이다. 인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에이스들만 모아놓은 축구단
한국에 온 내고향여자축구단의 구성은 아주 쟁쟁합니다. 리유일 감독은 2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 감독을 지냈습니다. 그러니 내고향여자축구단에 국제축구연맹(FIFA) 17세·20세 이하 연령별 월드컵 우승 경험이 있는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대거 포함된 것도 놀랍진 않습니다.
감독이 누구보다 북한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의 기량을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자기가 원하는 선수들을 데리고 와 축구팀을 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든 특정 감독에게 “나라의 최고 에이스들을 모아 클럽팀을 만들어보라”고 하면, 당연히 그 나라의 최강팀이 만들어질 것이 뻔하겠죠.
미스터리한 것은 어떻게 이유일은 내고향여자축구단 감독이 됐을까 하는 점입니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감독과 선수들을 스카우트하는 다른 나라의 클럽팀이라면, 최고의 감독을 선임하기 위해 연봉을 많이 주면 됩니다. 하지만 북한은 이런 자본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곳으로, 감독이나 선수가 연봉에 따라 이적하는 일은 없습니다.
북한에서 최고의 선수단은 국방성 산하 체육단인 4·25체육단입니다. 그 뒤로 보안성 소속의 압록강체육단, 평양시 소속의 평양체육단 등이 위치합니다.
감독이나 선수는 당연히 이런 체육단부터 가는 것이 순서입니다. 4·25체육단에서 불렀는데, 안 간다고 할 선수는 없습니다. 아니, 가기 싫어도 당에서 찾는데 가야 하는 것이 지금까지 북한 사람들이 아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내고향여자축구단은 도대체 어떤 미스터리한 힘을 써서 명문팀보다 더 나은 선수를 선발한 것일까요.
20일 오후 수원경기장에서 열린 수원FC 위민과 내고향여자축구단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응원단. 수원 뉴시스
● 장성택이 만든 내고향여자축구단
내고향여자축구단은 하루아침에 불쑥 튀어나온 팀은 아닙니다. 2012년 창단돼 2021~2022 시즌 북한 여자축구 1부 리그에 우승하면서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창단 시점부터 눈길이 갑니다. 김정은 체제가 막 시작된 2012년, 북한은 전반적인 체육 사업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국가체육지도위원회’를 출범시킨다는 정치국 결정서를 채택했습니다. 초대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은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맡았습니다.
장성택은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수장이 된 뒤 중국과의 합작으로 체육용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내고향합작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북한 스포츠용품 생산 독점 권한을 이 기업에 밀어주면서 산하에 여자축구단까지 창설해 후원 시스템을 정착시킨 것입니다.
이듬해 장성택이 처형되면서 기업 후원형 클럽 제도는 유명무실해진 듯합니다. 어찌 됐든 내고향여자축구단은 장성택 덕분에 출범된 클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장성택 처형 이후 입니다. 이후 장성택 잔재 숙청 바람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2000여명의 간부가 처형되고, 2만 여명의 간부들이 처벌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내고향여자축구단은 장성택 잔재 숙청에서 비껴갔습니다. 미스터리한 일입니다.
장성택 숙청은 비단 북한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던 거대 정치 세력의 몰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장성택 가문이 틀어쥐고 있던 막대한 이권 역시 김정은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대표적으로 장성택의 조카사위가 운영하던 평양의 택시사업소는 이설주 처가의 몫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이 택시사업소는 지금도 평양에서 돈을 쓸어 담고 있고, 평양 사람들은 이를 ‘이설주 택시’라고 부릅니다.
어쩌면 내고향합작회사도 이런 경우는 아닐까요. 김 씨 패밀리와 연관되지 않고선 내고향합작회사의 승승장구와 현재의 파워를 쉽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내고향합작회사는 이후 내고향무역회사로 이름을 바꾼 듯 보이고, 산하에 담배, 스포츠용품, 식품 등의 자회사들을 거느리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달 25일 북한군 박격포병 경기를 참관 중인 김정은이 손에 담배를 들고 장성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은이 가는 곳에는 늘 담배와 재떨이가 등장한다. 조선중앙TV 캡처
● 보위부 소속의 ‘내고향’ 브랜드
북한엔 담배회사가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한국엔 담배회사가 3개만 있는데, 북한엔 담배회사가 40개가 넘고, 상표만도 200여 개에 이릅니다.
북한의 흡연율은 세계적입니다. 여성은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남성은 거의 다 피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흡연율 때문에 담배공장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정작 많은 북한 주민은 필터가 달린 고급 담배를 피우기 어렵습니다. 서민들은 말린 담뱃잎을 썰어 노동신문과 같은 종이에 말아 피웁니다.
북한 담배 공장에서 만든 담배는 대개 수출용으로 소비됩니다. 최대 수출국은 중국으로, 합법적으로 또는 밀수로 많이 건너갑니다. 이중 내고향담배공장의 해외 진출이 가장 독보적인데, 이 회사는 중국을 넘어 중앙아시아, 중동과 몽골·러시아에도 담배를 수출합니다.
담배 생산량을 넘어설 정도로 수출이 잘 된 것인지, 북한 내부 담뱃잎 가격은 최근 2년 동안 10배 이상 상승해 애연가들이 비명을 지릅니다.
스위스 유학 시절이던 10대 중반부터 담배를 피운 것으로 알려진 김정은은 유치원, 탁아소 현지 시찰 도중에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자주 보였습니다. 그는 집권 이후 꽤 오랫동안 내고향담배공장에서 만든 ‘7·27’ 브랜드의 담배를 피웠습니다. 2018년부터 2년 정도 대성담배공장에서 만든 ‘건설’이란 담배를 피우기도 했지만, 2020년부터 다시 내고향담배공장에서 만든 ‘아침’ 브랜드의 담배로 옮겨갔습니다.
김정은이 이렇게 대놓고 밀어주다 보니 내고향도 몸집을 거침없이 키우고 있습니다. 2010년대 중반부터 스포츠용품 생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북한의 대외 선전용 매체 ‘조선의 오늘’은 2016년 ‘내고향’이 아디다스, 푸마 등 글로벌 스포츠용품업체와 경쟁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2024년엔 ‘내고향’이란 이름으로 러시아에 담배, 주류, 빵, 김치에 대한 상표 등록도 했습니다.
내고향은 취급하는 품목에 있어 북한의 다른 수출회사와 비교 불가할 정도입니다. 돈 되는 것들만 독점적으로 취급하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당연히 벌어들이는 돈의 규모도 많을 것입니다.
내고향합작회사의 모태 기업인 내고향담배공장은 2003~2004년경 국가보위부 소속 외화벌이 기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초대 사장은 김금산이란 인물입니다. 그는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과 주중 북한 대사를 지냈던 지재룡의 사위입니다. 고위 간부들이 돈 될만한 일을 일가에게 맡기는 일은 북한에선 일반적입니다.
김금산은 많은 돈을 당에 상납해 영웅 칭호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장성택 숙청 이후 돈을 상납해 영웅 칭호를 받았던 인물들도 여럿이 처형된 것을 감안하면, 영웅이라서 숙청되지 않은 것은 아닌 듯합니다. 또 김금산이 사장이긴 하지만, 내고향합작회사가 번 돈이 그나 또는 보위성에 모두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김정은의 말 한마디면 김금산도 죽은 목숨인데, 어떻게 자기 배만 채우겠습니까. 당연히 김정은에게 벌어들인 액수를 보고하고, 처분을 기다리겠죠. 이번 대회에서 내고향여자축구단이 받는 상금은 누구의 주머니에 얼마나 배분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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