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국으로 본 ‘초선의 민낯’…사고 치거나 입 다물거나[윤다빈의 세계 속 K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23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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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농업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농민의 토지 소유권입니다. 대부분 태국 농민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인 대출을 받을 수 없고, 비공식적인 대부업체에 의존해 빚의 굴레에 갇히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적인 신용 평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농민이 토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임시법을 제정해야 합니다.

농민은 생계를 유지하고 빚을 갚기 위해 화학 살충제를 다량 사용해 농산물 수확량을 늘리고 있습니다. 농약 사용을 줄이기 위해 생물학연구소를 설립하고 한약 사용을 지원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지난달 태국 총선에서 1당을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킨 전진당 피타 림짜른랏 대표(43)는 2019년 초선 하원의원 신분으로 대정부 연설을 합니다. 그는 태국 농업의 문제로 소유권, 농민 부채, 대마초, 농업 관광, 수자원 등 5가지 주제를 꺼내며 열변을 쏟아냈습니다.

다른 당 소속인 아누퐁 파오친다 내무부 장관은 그의 연설에 대해 “당신의 연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찬사를 남겼습니다. 이어 “농민의 토지 소유가 핵심 문제라는 데 동의한다”며 “3000만 농부와 농업인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태국은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없다”고 화답했습니다.

태국 총선에서 제1당에 오른 전진당 피타 림짜른랏 대표가 지난달 18일 기자회견을 마친 뒤 퇴장하고 있다. 30대 초선의원이었던 피타 림짜른닷은 태국 농민이 겪고 있는 문제와 해결책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면서 주목받았다. AP 뉴시스
태국 총선에서 제1당에 오른 전진당 피타 림짜른랏 대표가 지난달 18일 기자회견을 마친 뒤 퇴장하고 있다. 30대 초선의원이었던 피타 림짜른닷은 태국 농민이 겪고 있는 문제와 해결책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면서 주목받았다. AP 뉴시스

2020년 유엔 집계에 따르면 태국은 전체 인구의 약 30%가 농업 관련 분야에 종사할 정도로 농업이 국가 경제의 바탕을 이루는 나라입니다. 30대 초선의원이었던 피타 림짜른닷은 농민이 겪고 있는 문제와 해결책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면서 전 국민적인 주목을 받게 됩니다. 태국 정치 개혁의 아이콘이 된 피타 대표는 이처럼 초선 시절 의회 활동을 바탕으로 중앙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 ‘처럼회’ 논란…민주당 초선 81명 참담한 성적표
2020년 21대 총선에서 총 151명의 초선의원이 탄생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81명,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에서 59명의 새내기 의원이 배출됐습니다. 17대 국회 이후 처음으로 초선이 과반을 차지하는 국회가 된 것입니다. 초선의원의 임기가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이들의 의정활동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14일 대정부질문에서 장애인 학대 범죄와 장애인 정책의 맹점을 차분히 짚은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은 시각장애인 출신 비례대표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현업 복귀를 선언한 소방관 출신 민주당 오영환 의원은 오랜만에 정치권에 신선한 충격을 줬습니다.

하지만 많은 초선의원은 3년이 넘는 의정활동 기간 국민의 스트레스 지수만 높였습니다. ‘60억 가상화폐 보유 논란’으로 민주당을 탈당한 김남국 의원은 밑바닥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 당시에 이 모(李 某) 교수를 이모(姨母) 교수라 칭하며 망신당했던 그는 이 청문회 자리를 비롯해 국회 상임위 회의 중에도 코인 투자를 한 정황이 확인돼 기본 자질이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조국 백서’ 필자로 참여했던 김 의원은 21대 총선을 앞두고 당 지도부의 만류 분위기에도 서울 강서갑 공천을 신청해 논란이 됐습니다. 강서갑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 때 꾸준히 비판 목소리를 냈던 금태섭 의원의 지역구였습니다. 총선을 앞두고 당을 다시 한번 ‘조국 대 반 조국’ 내전 양상으로 밀어 넣은 것이죠. 떡잎부터 남달랐습니다.

‘60억 가상화폐’ 논란으로 민주당을 탈당한 무소속 김남국 의원이 1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교육위원회로 상임위를 바꾼 뒤 처음으로 국회 상임위 회의장을 찾았다. 그는 국회 상임위 회의 중에도 코인 투자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동아일보 DB
‘60억 가상화폐’ 논란으로 민주당을 탈당한 무소속 김남국 의원이 1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교육위원회로 상임위를 바꾼 뒤 처음으로 국회 상임위 회의장을 찾았다. 그는 국회 상임위 회의 중에도 코인 투자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동아일보 DB

김 의원이 속한 민주당 내 강경파 초선 모임인 처럼회 소속의 민형배 의원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국면에서 꼼수 탈당했고, 최강욱 의원은 지난해 온라인 화상 회의 중 김 의원이 카메라를 켜지 않자 성적인 행위를 상징하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당원권 정지 6개월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허위뉴스로 판명 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청담동 술자리’ 의혹 제기를 한 김의겸 의원도 이 모임 소속입니다.

2020년 7월 처럼회 소속 의원들이 TV에 ‘대전 침수 아파트 1명 심정지’라는 문구와 함께 침수 피해 소식이 보도되는 시점에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여기에는 대전을 지역구로 둔 황운하 의원도 포함돼 있다. 왼쪽부터 민주당 이재정 김승원 박주민 최강욱 김용민 황운하 김남국 의원. 최강욱 의원 페이스북 캡처
2020년 7월 처럼회 소속 의원들이 TV에 ‘대전 침수 아파트 1명 심정지’라는 문구와 함께 침수 피해 소식이 보도되는 시점에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여기에는 대전을 지역구로 둔 황운하 의원도 포함돼 있다. 왼쪽부터 민주당 이재정 김승원 박주민 최강욱 김용민 황운하 김남국 의원. 최강욱 의원 페이스북 캡처

대다수 의원은 자신의 재선을 위해 당내 줄서기에 몰두하면서 소신 없는 직업 정치인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와 방탄 논란 등 외부의 따가운 시선에도 어느 누구도 성찰하거나 비판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습니다. 공천권을 쥔 당 대표의 위세에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으로서의 역할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민주당 초선은 도대체 뭘 하고 있나’라는 목소리가 당 안팎에서 나왔습니다.

정작 ‘86용퇴’ ‘조국 사태’ ‘김남국 코인 논란’ 등 당 개혁이 필요할 때 목소리를 낸 것은 박지현 전 비상대책위원장이나 이동학 전 최고위원, 양소영 전국대학생위원장과 같은 원외 청년인사였습니다.

● ‘철밥통’으로 전락한 국민의힘 초선
국민의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자금 부정 수수(정치자금법 위반)와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던 황보승희 의원은 19일 탈당과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황보 의원은 등원 초부터 내연남 관련 소문이 무성했지만 무시와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하지만 내연남의 관용차·보좌진·사무실 경비 사적 이용 의혹까지 보도되자 끝내 버티지 못했습니다.

여당인 국민의힘 초선의원의 눈치 보기는 민주당보다 더합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행여나 공천에서 탈락할까 용산 대통령실 눈치 보기에 바쁩니다. ‘반윤(反尹)’의 상징이었던 이준석 전 대표를 찍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초선의 몸 사리기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국민의힘 초선의 침묵에는 구조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국민의힘이 21대 총선에서 대패하면서 영남과 강남 3구, 비례대표 의원을 제외하고는 당선자를 거의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보수당이 유리한 지역구에서 당선된 이들은 ‘공천은 곧 당선’이라는 공식을 갖고 있습니다. 여론에 호응하기보다는 차기 공천을 위해 자신의 당내 입지를 다지는 게 정치적으로 유리한 것이죠.

필자는 21대 총선이 끝난 직후 국민의힘에 출입하면서 초선의원의 무기력에 놀라곤 했습니다. 상당수가 공·사석에서 “의석수가 부족해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직 초선이라 힘이 없다” “정치를 잘 모른다”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당 소속 의원 중 초선 비중이 절반을 넘어서면서 ‘실세는 초선’이라는 말이 나왔고,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초선을 중용했지만 정작 이들은 정치의 주역이 되지 못했습니다.

대신 지난해 대선에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실정에 힘입어 승리를 당한 뒤(?)에는 누구보다 빠르게 ‘윤석열 정권 호위무사’로 변신했습니다.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이 국감장에서 ‘웃기고 있네’라는 필담을 나누다 퇴장당하자 윤 대통령 수행실장 출신인 초선 이용 의원이 퇴장을 지시한 5선의 주호영 원내대표(국회 운영위원장)를 공격하는 ‘근거 있는 자신감’까지 보였습니다. 국민의힘 초선 50명은 지난 전당대회에서 나경원 전 의원을 쳐내려는 대통령실의 의중에 맞춰 나 전 의원을 공격하는 성명을 내면서 홍위병을 자처했습니다.

올 4월 국민의힘 황보승희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선에 관한 전원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황보 의원은 정치자금 부정 수수와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 등으로 탈당과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서울=뉴시스
올 4월 국민의힘 황보승희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선에 관한 전원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황보 의원은 정치자금 부정 수수와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 등으로 탈당과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서울=뉴시스

이준석 전 대표는 자신의 저서 ‘거부할 수 없는 미래’에서 국민의힘 초선을 향해 “가장 개혁적이어야 할 이들이 정당 내에서 보여주는 양상은 매우 아픈 대목”이라면서 “(초선의원들 임기가) 3년이 지난 즈음, 누가 소장파로서 목소리를 높여왔는지 짚어볼 때가 됐다”고 평했습니다.

●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은 달랐다
초선 정치의 실패가 전적으로 초선의원 개개인의 역량 문제 탓은 아닐 겁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의원 한 명 한 명을 살펴보면 뛰어난 면이 있습니다. 유권자 눈에는 놀고먹는 기득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대부분 의원은 조찬 모임부터 시작해 의정활동, 지역구 모임, 세미나, 친교 활동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냅니다.

최근 해외에서는 오스트리아 제바스티안 쿠르츠 총리(37), 핀란드 산나 마린 총리(39), 뉴질랜드 저신다 아던 전 총리(43) 등 젊은 지도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속한 정당 내 자유롭고 치열한 토론 문화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K정치처럼 강성 지지자들이 의원의 소신 행보를 가로막고, 당론이라는 이름으로 토론을 생략한 채 개인의 의사결정을 제약하는 구조에서 당찬 의정활동을 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초선의원들이 분명히 알아야 점이 있습니다. 태국 정치에 돌풍을 일으킨 피타 림짜른랏 대표가 처한 정치 환경은 더욱 나빴습니다. 태국에는 ‘왕실 모욕죄’가 존재합니다. 태국의 국왕이나 국왕의 가족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는 법으로 형량은 최대 15년입니다.

왕실과 군부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도 거셉니다. 피타 대표 역시 자신이 몸담은 신미래당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해산된 당을 전진당으로 재탄생시킨 뒤 이번 총선에서 왕실 모독죄 폐지 공약을 앞세워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6세의 나이로 의원이 됐습니다. 그는 같은 당 소속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벌였고, 사사오입 개헌안이 통과되자 7개월 만에 자유당을 떠났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초선의원 시절 동료 의원의 구속을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신청해 원고 한 장 없이 5시간 19분 동안 연설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초선 야당 의원으로서 ‘5공 청문회’에서 전직 대통령, 재벌 회장을 앞에 두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질의하는 모습으로 국민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1990년에는 3당 합당에 반대하며 영남 출신으로 민주당계 정당으로 옮기는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1988년 11월 13대 국회 5공비리조사특위 일해재단 청문회장에서 증인으로 나온 정주영 현대회장을 심문하고 있는 노무현 의원. 그는 전직 대통령, 재벌 회장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질의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노무현재단 홈페이지 캡처
1988년 11월 13대 국회 5공비리조사특위 일해재단 청문회장에서 증인으로 나온 정주영 현대회장을 심문하고 있는 노무현 의원. 그는 전직 대통령, 재벌 회장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질의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노무현재단 홈페이지 캡처

정치 지도자 반열에 오른 많은 이들은 군부 독재, 언론자유 제한 등 엄혹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소신 행보를 통해 유권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선수(選數)를 더 쌓아서, 힘을 더 키우고 나서 소신 행보를 하겠다는 말은 적어도 막스 베버가 말한 책임정치를 꿈꾸는 정치인에게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년 4월 총선까지 9개월여 남았습니다. 정치 개혁을 외쳤던 초선이 개혁의 대상이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따뜻한 봄이 되면 강경파이거나 철밥통인 이들의 봄날도 끝날지 모릅니다.

‘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을까?’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진 의문입니다. 해외 정치와 비교하면서 제 나름의 해답을 글로 쓰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의 품격을 높일 해법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찾아보고 싶습니다. 이메일 empty@donga.com으로 소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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