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 “엄마” 놓고 싶지 않은 손 24일 강원 고성군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이복순 씨(88·위 사진 왼쪽)가 43년 전 납북된 아들 정건목 씨와 만나 손을 잡으며 기뻐하고 있다. 아래쪽 사진은 정 씨(점선 안)가 1972년 납북된 지 2년 만인 1974년 묘향산에서 찍은 사진. 금강산=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납북자가족모임 제공
24일 오후 금강산호텔에 마련된 이산가족 상봉장. 잿빛 양복을 입은 주름진 얼굴의 정건목 씨(64)는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43년 전 1972년 12월, 그는 오대양 62호를 타고 조업하다 북한에 납치됐다. 누나 정매 씨(66), 여동생 정향 씨(54)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사이 반백의 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섰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납북된 아들은 43년 만에 초로의 얼굴로 어머니 이복순 씨(88)의 품으로 달려가 오열했다. 7남매 중 셋째. ‘착하고 활발하고 야무졌던 내 아들, 새벽밥 먹고 일 나갈 때마다 동생들 몫을 남겨 줬던, 우애가 누구보다 좋았던 내 아들….’
“아들 살아 있어. 엄마야, 왜 자꾸 우나….” 정 씨는 어머니를 달랬다.
○ 누구도 납북이라 말 못 하는 이상한 상봉
이날 누구도 정 씨가 납북됐다는 사실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정 씨가 상봉장 테이블에서 어머니 옆자리에 앉으려 하자 북한에서 결혼한 아내 박미옥 씨(58)가 “저쪽에 가 앉아라”며 정 씨를 밀쳐냈다. 어머니는 북한에 납치된 아들을 북한의 며느리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앉아야 했다. 북한의 며느리 박 씨는 “우리 당이 남편을 조선노동당원 시켜 주고…. 고생한 것 하나도 없다”며 “다 무상이라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관계자들은 정 씨를 취재하려는 기자단을 제지했다. 녹음기를 치워 버리기도 했다. 정 씨가 어머니 이 씨의 휠체어를 밀려고 하자 북한 관계자들이 막는 일도 발생했다.
이진우라는 이름의 북측 보장성원(행사지원인력)은 북한이 준비한 선물에 대해 기자들이 묻자 동문서답식으로 “우리 가족들이 종종 ‘(남측 선물을) 선물이 아니라 오물’이라고 한다. 치약 칫솔 라면을 가득 넣곤 하던데 북에 라면이 없겠냐”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 납북자 517명 중 겨우 19명 일회성 상봉
남북은 2000년부터 납북자 국군포로를 ‘특수 이산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포함시켰다. 행사 때마다 1, 2명씩 상봉했지만 북한은 단 한 번도 이들의 납북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부가 공식 인정한 납북자 517명 가운데 상봉자는 19명뿐이다. 정부가 2000∼2015년 생사 확인을 요청한 납북자 160명 중 54명의 생사만 확인됐다. 이번 상봉에 앞서 납북자 20명의 생사 확인을 요청하자 북한은 7명은 사망, 12명은 생사 확인 불가로 통보했다. 국군포로 30명의 생사 확인 요청에는 응답이 없었다.
○ 상봉 기간 NLL 침범
상봉이 진행 중이던 24일 오후 3시 30분경 북한 고속경비정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700여 m 침범했다. 해군이 40mm 기관포 5발을 경고 사격하자 퇴각했다. 북한 대남기구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25일 “한반도 정세를 격화시키려는 고의적 도발 행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국 어선을 단속하다가 NLL을 넘어왔고, 곧바로 돌아가 도발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여 남북 관계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충복 북한 적십자중앙위원회 위원장은 25일 상봉장에서 “이번 상봉 행사가 끝나면 상시 접촉(정례화) 문제와 편지 교환 문제 등 이산가족 관련 문제를 적십자 회담을 통해 남측과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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